한일 관계를 얼어붙게 한 이슈는 언제나 ‘치킨게임’의 연속이었다. 둘 다 직진하면 대참사지만 어느 한쪽도 먼저 피할 생각이 없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 수출규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갈등 등 어느 하나 이런 양상이 아닌 적이 없었다. 그때마다 양국 정부는 매듭지을 생각은 물론 비켜갈 의지조차 없던 적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는 난도 최상의 치킨게임이란 게 한일 당국의 공통된 인식이다. 무엇보다 2018년 우리 대법원의 판결이 결정타였다. 일본 전범기업에 강제징용 피해자 손해배상을 하라는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지자 우리 정부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기업 자산 현금화가 사실상 한일 관계의 레드라인이라던 일본은 더욱 자세를 고쳐 잡고 귀를 닫고 날선 메시지만 쏟아냈다. 이젠 한일 정상의 입지까지 불안 요소로 꼽힌다. 30%대 지지율을 오르내리는 동병상련을 겪어서인지 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의 얼굴에선 먼저 관계를 리드해보겠단 자신감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호재가 있긴 하다. 당국자들 설명에 따르면 관계 회복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는 양국 정부 모두 꽤 높은 수준에서 형성된 듯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까지 쏘아대며 “끔찍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며 위협하는 북한에 맞서 한미일 안보협력 필요성이 높아진 건 한일 관계에는 호재다.
실제 강제징용 협의에 나섰던 고위 당국자는 “밖에서 보는 것보단 일본 측과 비공개 회동 분위기는 훈훈했다”고 귀띔했다. 일본의 미묘한 자세 변화도 눈에 띈다. 요즘 일본 외교관들은 경제 관료 못지않게 한국인 방문객 숫자 등을 꿰고 있다고 한다. 일본 입장에서도 관계 개선에 따른 실익이 많다고 판단하는 기류라는 얘기다.
강제징용 문제를 풀려면 우선 피해자들 입장부터 더 들어보는 게 우선이다. 그런 뒤 상식적인 방식으로 협의해 가면 된다. 물론 이 과정 자체가 난관의 연속이겠지만 요즘 관가에서 자주 들리는 고행의 봉우리는 따로 있다. 고양이 목에 ‘누가’ 방울을 다느냐다. 다른 고위 당국자는 “결국 협상이 논의를 넘어 협의 단계까지 가려면 누군가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며 “우리나 저쪽(일본)이나 이 팽팽한 풍선을 누가 손에 쥐느냐를 두고 눈치게임이 시작됐다”고 했다.
최근 한일 관계의 무게를 실감하는 상황이 잇따랐다. 대통령실이 9월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흔쾌히 합의했다”고 섣불리 일정을 발표했다가 두들겨 맞은 게 대표적이다. 그렇다 보니 관가에선 몸을 사리는 분위기가 없지 않다고 한다. 야당 대표가 동해상 한미일 연합훈련을 겨냥해 “욱일기가 다시 한반도에 걸릴 수 있다”며 서슬 시퍼런 친일 공세에 나서는데 훨씬 민감한 강제징용 문제의 키를 누가 쥘 수 있겠느냐는 자조까지 들린다.
결국 양국 정상이 책임지고 나서야 한다. 이때 가장 피해야 할 건 밀실 합의다. 당장 민감한 국민 정서를 의식해 뒤에서 주고받기식 합의에 나서다 정권 바뀌고 발목 잡힌 경우를 우리는 너무 많이 봐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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