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재명]트라우마는 오래 지속된다… 누구든 1577-0199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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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명 정책사회부 차장
박재명 정책사회부 차장

2008년 1월 7일 경기 이천시 호법면의 ㈜코리아2000 소유 냉동창고에서 큰불이 났다. 밀폐된 공간에서 전기 용접을 하다가 불씨가 벽 사이에 남아 있던 유증기(油蒸氣)로 옮겨붙었다. ‘펑…펑…펑’ 10초 간격의 세 차례 폭발 후 40명이 목숨을 잃었다.

기자는 그때 입사 4개월 된 수습기자였다. 사회부 출동 차량은 화재 소식을 듣자마자 기자 2명과 수습기자 2명을 태우고 내달렸다. 추가 폭발 우려에 소방관들은 우리가 도착할 즈음에서야 희생자를 싣고 나왔다. 당시 취재수첩을 보면 12번째 사망자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희생자가 나오는 걸 눈으로 확인한 뒤 선배 기자에게 보고했다.

흔히 폭발이나 화재 사고가 나면 시신이 새까맣게 타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얼룩덜룩한 피부가 검붉게 남는다. 불에 탄 신체 기관도 대부분 식별 가능하다. 그때 봤던 어느 희생자의 눈빛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예기치 않게 가끔 떠오른다. 한국기자협회가 4월 진행한 조사에서 현직 기자의 79%가 “기자 일을 하면서 트라우마를 겪었다”고 답했다는데, 기자 역시 그중 한 명인 셈이다.

실제로 트라우마는 오래 지속된다. 대형 재난을 직접 겪었을 때는 30년 이상 지속될 수 있다는 의견이 많다. 사고 유가족에겐 그 기간이 평생이 될 것이다. 오강섭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본보 인터뷰에서 “미국은 9·11테러 20년이 지난 지금도 트라우마 이후에 생긴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런 트라우마의 장기화를 막는 게 빠른 치료다. 전문의들은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조금 있으면 잊혀지겠지’ 하다가 PTSD가 심각하게 악화된 후 병원을 찾는 사람이 많다고 입을 모은다. 재난에 직접적으로 휘말린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무슨 트라우마 피해자야’라는 생각에 치료 적기를 놓치는 일도 적지 않게 벌어진다.

지난달 29일 발생한 이태원 핼러윈 참사는 ‘내가 무슨 피해자야’란 환자가 너무나도 많이 나온 사건이었다. 이번 참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로 사실상 생중계된 첫 참사다. 다수의 10대 학생을 포함해 새벽까지 ‘무삭제 사고 영상’을 접했던 사람들 상당수가 이 범주에 해당될 것이다.

2014년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 사회에도 트라우마 치료에 대한 공감대가 생겼다. 인간은 대형 재난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상처받을 수 있고, 그 상처는 반드시 치료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문제는 그런 일로 정신건강의학과의 문을 두드리는 걸 주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전화로 할 수 있는 ‘마음 응급처치’라도 하길 권한다.

대표적인 곳이 정신건강 위기상담전화 1577-0199다. 외우기 쉬운 129 보건복지콜센터로 전화해도 된다. 행정안전부와 대한적십자사 역시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1670-9512)에서 모든 재난 경험자의 심리적 응급처치를 하고 있다. 한국심리학회도 이태원 참사를 계기로 무료 심리상담(1670-5724)을 시작했다. 연이은 사건사고로 많은 사람에게 생긴 마음의 상처가 빨리 낫기를 기원한다.

#트라우마#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1577-0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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