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달 7.7%로 떨어졌다. 6월 9.1%로 정점을 찍은 후에도 줄곧 8%대에 머물러 오던 미국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7%대에 진입함에 따라 금융시장에서는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기준금리 인상 속도를 조절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한국의 코스피, 코스닥 역시 3% 넘게 올랐고, 서울 외환시장에서 원-달러 환율은 1318원으로 60원 가까이 급락했다.
미국에서 발표된 숫자 하나에 세계 경제가 갑자기 핑크빛 무드에 휩싸였지만 이런 분위기가 지속되긴 쉽지 않다. 지난주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은 다음 달 금리 인상 폭을 줄일 뜻을 내비치면서도 더 오래, 더 높이 금리를 올리겠다고 했다. 에너지 가격을 끌어올린 우크라이나 전쟁도 겨울을 넘길 전망이다. 최근에는 세계 3위 가상화폐 거래소인 FTX 위기가 금융권으로 번져 ‘코인판 리먼브러더스 사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특히 글로벌 경기침체가 막 문턱에 들어선 걸 고려하면 수출로 먹고사는 한국 경제의 어려움은 훨씬 길어질 가능성이 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내년 3.2%의 높은 물가와 잠재 성장률에 못 미치는 1.8% 성장을 예고했다. 오일쇼크,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첫해를 빼면 전례 없이 낮은 성장률이다.
게다가 춘천 레고랜드 사태 등의 여파로 자금시장이 경색돼 대기업들마저 자금 조달이 어려워지고 있다. 높은 금리를 줘도 단기자금밖에 조달하지 못하는 중소기업, 건설업체들은 줄도산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주택담보대출 등의 금리가 7%를 넘어서면서 무리해 집을 산 가계의 파산 가능성도 커졌다. 설상가상 최대 교역국인 중국마저 수출이 29개월 만에 감소하는 등 침체에 빠져들고 있다.
‘10월 물가 정점론’을 주장해온 정부와 한국은행은 미국 물가상승률 하락을 반기는 분위기다. 하지만 10월 한국의 물가상승률이 전달보다 높아지는 등 국내 물가가 잡혔다는 신호는 없다. 한전의 막대한 적자 탓에 내년에는 큰 폭의 전기요금 인상도 불가피하다. 물가가 오른 만큼 임금을 높여 달라는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국제유가 역시 언제든 반등할 수 있다. 정부와 한은은 섣불리 긴장을 늦추지 말고 급변하는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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