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체 없던 김복진의 ‘소년’, 3D 기술로 부활하다[윤범모의 현미경으로 본 명화]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15일 03시 00분


근대기의 첫 조소예술가 김복진(1901∼1940)은 작품이 거의 남지 않은 비운의 작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 속에 
작품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3D 디지털 기술에 젊은 작가들의 손길이 더해져 몇몇 작품이 되살아났다. 평면의 흑백 
도판(왼쪽)으로만 원형을 추정하던 대표작 ‘소년’(1940년)은 데이터화, 입체화, 수작업을 통해 석고상으로 
복원(오른쪽)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근대기의 첫 조소예술가 김복진(1901∼1940)은 작품이 거의 남지 않은 비운의 작가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란 속에 작품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3D 디지털 기술에 젊은 작가들의 손길이 더해져 몇몇 작품이 되살아났다. 평면의 흑백 도판(왼쪽)으로만 원형을 추정하던 대표작 ‘소년’(1940년)은 데이터화, 입체화, 수작업을 통해 석고상으로 복원(오른쪽)됐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어떤 작가가 있었다. 요절한 것도 안타까운데 남겨진 작품도 없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하는데, 대표작은커녕 반반한 작품 하나 제대로 남겨 놓을 수 없게 되다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게다가 유족조차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다 잃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작가의 이름은 지워지기 시작했다. 근대기의 첫 조소예술가 김복진(1901∼1940) 이야기다.

나는 20세기 전반부의 한국 예술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뽑으라 한다면 그의 이름을 들고 싶다. 김복진. 그는 1925년 도쿄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근대 조각 제1호’ 작가가 되었다. 선구자의 일생은 조각가 생활로만 묶이지 않았다. 그는 비평가, 문예운동가, 특히 사회주의 사상 운동가로 영역을 넓혔다.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조직에서의 김복진 역할은 더 강조되어야 할 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복진의 무산자 예술과 독립을 위한 ‘운동’에 대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대응은 감옥행이었다. 옥중 생활 5년 이상, 그리고 39년의 짧은 생애. 그러니까 김복진의 사회활동이라 해봐야 10년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은 역사에 빛나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역의 미술관을 지원하기 위한 협력망 사업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이번에는 충북 청주시립미술관과 협업하여 인체조각 특별전을 마련했다. ‘김복진과 근현대 조각가들’(내년 1월 29일까지 청주시립미술관). 전시는 윤효중, 김경승, 권진규, 김세중, 최만린, 최종태, 심정수, 김영원, 류인, 구본주 등 주요 조각가들의 명품으로 꾸몄다. 이들 가운데 단연 눈길을 끄는 작가는 김복진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생전의 김복진은 50여 점의 조소 작품을 제작했다. 이들 작품은 일제강점기 말 공출되거나 6·25전쟁 당시 모두 망실되었다. 원작으로 남아 있는 작품은 기념조형물이거나 불상 같은 경우로, 한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이렇듯 불행한 상황에서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 대여한 작품은 ‘러들로 흉판’(1938년·연세대 동은의학박물관 소장)과 ‘공주 소림원 석고 미륵여래입상’(1935년)이다. 이들 등록문화재는 소중한 작품으로 모두 내가 발굴하여 미술계에 소개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북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의 모형인 소림원 불상은 불단 위에 봉안된 예배상인데도 잠시 미술관으로 외출하는 이변을 보였다.

고려의 의기(義妓)를 형상화한 ‘백화’(1938년) 역시 도판을 토대로 해 목조로 축소해서 재현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고려의 의기(義妓)를 형상화한 ‘백화’(1938년) 역시 도판을 토대로 해 목조로 축소해서 재현해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복진의 대표작은 ‘소년’(1940년)이나 ‘백화’(1938년)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흑백 도판으로만 남아 있어 늘 아쉬웠다. 이번 청주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은 새로운 형식의 도전을 감행했다. 작품 재현, 바로 그것이다. 3D 스캔이나 3D 프린팅 같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망실된 작품의 재현 작업을 시도했다. 평면 도판의 입체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측면은 작품과 비슷한 체형의 모델을 구해 같은 포즈를 취하게 하여 유사한 데이터 값을 추출했다. 초벌 덩어리에 점토를 붙여 입체화했고 수작업으로 마감했다. 그래서 ‘소년’은 부활했다. 젊은 작가 이병호, 장준호 등이 심혈을 기울여 원작의 분위기를 복원했다.

원래 ‘소년’은 제19회 조선미전(1940년) 출품작으로 특선에 이어 조선총독상을 수상했고, 추천 작가라는 칭호까지 얻게 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영광을 얻은 작가는 불과 3개월 뒤에 사망했다. ‘소년’은 한 발을 앞세우면서 전향적이고 늠름한 자세를 보이고 있는 입상이다. 작가의 친동생 김기진(소설가·비평가)은 이 작품을 보고, 사색적이면서 명랑감이 충만하고 진취적이면서 섬세하다고 평가했다. 김복진은 도쿄 유학 시절 교정에 설치되어 있던 로댕의 작품 ‘청동시대’를 연구했다. 프랑스 정부가 로댕 작품을 일본으로 기증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복진은 비록 일제 치하였지만 조선의 미래를 소년으로 상징화했다. ‘백화’는 목조 작품으로 축소하여 재현했다. ‘백화’는 고려의 의기(義妓)로 같은 이름의 박화성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김복진은 배우 한은진을 모델로 삼아 작품을 제작했다. 나는 생전의 한은진으로부터 제작에 얽힌 비화를 들은 바 있다. 이런 작품의 원작이 남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김복진의 제자 이국전은 스승의 예술세계에 대하여 민족 전통의 존중, 그리고 현실과 진실에서의 아름다움 추구라 했다. 달리 표현하면 진보적 사실주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김복진의 위대한 생애와 예술은 재조명되어야 한다. 대가풍의 작가로서 그는 거대 담론을 남겨 주었다. 나는 김복진을 스승으로 삼아 그를 기리는 사업을 펼친 바 있다. 청주 팔봉산에서 무덤을 찾아 묘비를 건립하고, 전집 출판이나 기념 전시와 학술대회 개최 등 동학과 함께 나름 열정을 펼치기도 했다. 그와 같은 결실은 졸저 ‘김복진 연구’(2010년) 출판으로 이어졌다. 이 학술서는 김복진의 다양한 세계를 두루 살피게 했고, 특히 비밀문서로 묶여 있던 김복진 관련 취조문서와 재판 관련 문서를 발굴하여 부록으로 전재하게도 했다. 일제의 조선 지배를 거부한 죄명은 그로 하여금 오랜 기간 옥중 투쟁을 하게 했고, 이는 뒤에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로 보답하게 했다. 유족 대표(김기진의 딸인 김복희 소프라노 가수)는 미국 이민을 가면서, 김복진의 적자(嫡子)인 것처럼 나에게 훈장증을 건네주고 갔다.

마침 청주시는 김복진미술상을 제정하고 김복진 기리기 사업에 정성을 모으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와 같은 기리기 사업의 일환으로 이번 조각 전시를 개최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전시장에서 ‘소년’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체험이리라.

#김복진#3d#석고상#백화#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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