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인류학자와 철학자가 머리를 맞대 만든 저서 ‘가짜노동’에는 ‘보어아웃 증후군’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근로자들이 회사에 출근해 일하는 동안 실제 일하는 시간이 적다고 느낄 때 오는 지루함과 스트레스를 총칭하는 개념이다. 과로로 인한 ‘번아웃’과는 결이 다르다. 이 책에선 보어아웃 증후군을 소개하기 위해 “그렇게 적은 일을 하고 봉급을 받는 게 수치스러울 정도”라며 고용주에게 소송을 건 한 인물을 인용하고 있다.
“회사 내에서 나는 과연 충분한 일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근로자들의 판단은 제각각일 것이다. 보어아웃 증후군을 겪는 이들은 회사 내에서 쓸데없는 잡무에 시간을 빼앗기거나 단순 직무를 어처구니없을 만큼 복잡하게 마무리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다. 형식적인 회의나 보고서, ‘관리를 위한 관리’ 업무에 진이 빠진 이들이 여기에 속한다.
스트레스를 덜기 위한 방법으로 ‘조용한 사직’을 택하는 근로자들도 있다. 이들은 직장에서 얻을 수 있는 만병의 근원을 받은 것(봉급)보다 더 일하고자 하는 욕심으로 규정한다. 그 때문에 최소한의 일만 함으로써 스스로를 지키려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을 마냥 게으르게 볼 것도 아니다. 업무 스트레스로부터 지켜낸 체력과 열정은 직장 바깥에서의 자아실현을 위해 알뜰살뜰 사용되니까.
일터와 가정의 경계 없이 분골쇄신 일했던 기성세대들은 새로운 업무 태도로 무장한 젊은 근로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데 애를 먹곤 한다. 일을 많이 주면 번아웃이 왔다고 하고 일을 줄여주면 보어아웃이 온다는, 그래서 자율에 맡겼더니 조용한 사직에 나서는 후배들을 철부지로 여기기도 한다.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일에 대한 대화는 늘 겉돌기 마련이다. 최근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은 직원들에게 “월급 받는 만큼 일하지 말고 각자의 보람을 찾아 일하라”고 독려했다. 그러자 직원들은 직장인 게시판 등에 “월급이 늘어야 보람이 생긴다” “우리도 임원들만큼 월급 받으면 보람을 찾을 수 있다”고 대응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은 이런 게시판에 구시렁대지도 않는다”고 꼬집은 직원도 있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간 시각차를 마냥 두고 볼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대기업 계열사의 한 대표는 “신사업을 발굴 육성하려면 정규 노동시간에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데 직원들에게 이를 설명하고 동기를 부여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등 열정적인 근로자가 많은 나라에 역전당할까 봐 두렵다”고 했다.
경제 성장이 일정 궤도에 오른 나라들 사이에선 일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종의 세대 갈등으로 굳어지는 중이다. 회사가 10년 뒤에도 유지될지에 대한 불안, 끝없는 경쟁과 바늘구멍 같은 기회에서 오는 불안이 뒤섞여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는 것이다.
공감, 소통, 보상은 과연 이들을 다시 붙여주는 아교가 될 수 있을까. 일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를 좁히는 게 가능하긴 한 일일까. 조직문화를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기업들의 속앓이는 당분간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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