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29일 안철수 당시 국민의당 대표(현 국민의힘 의원)는 기자회견을 열고 “모든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내려놓겠다”며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주장한 ‘책임윤리’를 거론했다. 주요 당직자들이 선거 홍보물 제작업체 등에 일감을 준 뒤 리베이트 형식으로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왕모 사무부총장이 구속된 지 이틀 만이었다.
당시 관련자들은 혐의를 부인했고 청와대의 기획사정 의혹도 제기됐지만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안 의원은 ‘일보 후퇴’를 선택했다. 이듬해 1월 연루된 이들은 모두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이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가 확정했다.
이 선택 덕분에 안 의원은 재기할 수 있었다. 2017년 대선에서 정권 창출에 실패하고 올해 국민의힘에 입당하면서 제3당의 꿈을 실현하지 못하긴 했지만 말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의 모습을 보면서 6년 전 안 의원의 기자회견이 떠올랐다.
그동안 정치권에선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 일단 어느 정도 혐의를 인정하고 대국민 사과를 하거나 사퇴 등으로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1997년 한보 비리 사태로 아들 현철 씨가 구속되자 김영삼 전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를 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2002년 6월 아들 홍업 씨가 구속되자 대국민 사과를 했다. 측근들의 불법 대선자금 수수와 관련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등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민주당 이재명 대표와 측근이 연루된 각종 의혹에선 이 같은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이 대표는 올 9월 선거법상 허위사실 공표 혐의로 기소되자 “검찰의 억지 기소에는 늘 그래 왔듯 국민과 사법부를 믿으며, 국민의 충직한 일꾼으로서 민생에 주력하겠다”고 했다.
이후 이 대표의 최측근인 김용 민주연구원 부원장이 지난달 22일 구속됐다. 그가 ‘믿는다’던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한 지 28일째다. 법원의 1차 판단이 나왔는데도 이 대표는 사과도 안 하고, 어떤 책임도 안 지고 있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선 책임정치가 실종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2020년 7월 자신의 선거법 위반 사건이 무죄 취지로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되자 “공정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려주신 대법원에 감사드린다”며 찬사를 보낸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대선 과정에서 이 대표는 변호사비 대납, 백현동, 성남FC 후원금 등 각종 의혹에 대해 유감 표명조차 제대로 한 적이 없다. 부인 김혜경 씨의 법인카드 유용 의혹에 대해 측근 배모 씨 하급자였던 A 씨가 물증을 제시하며 폭로하자 “몰랐다”며 사과했을 뿐이다.
이제 검찰의 칼끝은 이 대표와 ‘정치적 공동체’ 관계인 정진상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을 향하고 있다. 정 실장은 18일 법원에서 구속영장실질심사를 받는다. 정 실장마저 구속될 경우 이 대표가 어떤 언행을 보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대표에게 ‘일보 후퇴’는 없어 보인다.
당 안팎에선 김 부원장과 정 실장 수사에 대한 민주당의 대응을 두고 “왜 당이 나서냐”는 불만이 제기되고 있다. 민주당이 ‘이재명당’의 길을 갈지, 책임 있는 수권정당의 길을 갈지 국민들은 지켜볼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