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사는 현재를 비추고 미래의 길을 제시하는 거울이라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역사를 통해 우리는 과거 사회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 등 정신적 교훈도 얻을 수 있다. 필자 역시 역사를 공부할수록 더 성숙해지는 것을 느낀다.
역사를 만나는 방법은 다양하다. 가장 일반적인 독서를 비롯해 최근엔 역사 다큐멘터리나 역사 강의를 수강하는 이들도 많아지는 것 같다. 필자는 이 가운데 역사 관련 박물관이나 기념관을 즐겨 찾는다. 역사 사료나 문화재를 통해 입체적으로 역사를 접할 수 있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최근엔 세계 각국 어느 도시에 가든 역사를 다룬 박물관이나 기념관이 하나쯤 있을 정도로 보편화됐다. 대중의 역사 지식을 풍부하게 하고 역사의식을 고양하려는 의도가 아닐까 한다. 그중 독일의 박물관, 기념관들은 특히 호평을 받고 있는데, 아마도 과거사 청산 차원에서 제2차 세계대전 관련 사료를 꼼꼼히 정리해서일 것이다.
독일은 패전 이후 나치 정권의 강제 노역 현장 등 관련 역사자료 정리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이를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는 측면도 있지만 그 자체가 주는 울림도 크다. 박물관이나 기념관에 머물며 인종 학살 등 나치의 만행과 민간인 피해 등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전쟁과 범죄의 대명사였던 독일은 이렇듯 철저한 과거 청산과 자기반성으로 한층 성숙된 역사의식과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독일의 모습은 비슷한 범죄를 저질렀으나 전후 대응이 상이한 일부 국가와 비교되기도 한다. 한 국가가 잘못했던 과거에 대해 속죄하고 반성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일은 피해 국가가 받은 상처와 아픔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일뿐더러 가해 국가가 미래에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 한국의 역사박물관은 어떨까. 최근 K문화 붐으로 한국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아졌고, 한국을 찾는 이들도 늘고 있다. 이들도 한국의 박물관을 찾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박물관을 보다 보면 영광의 역사, 승리의 역사에 비해 패한 역사는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다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후대에 과거 승리의 환호를 전하는 것도 좋지만 가슴 아프게 패했던 역사를 전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못지않게 중요한데 말이다.
한데 최근 이런 아쉬움을 일거에 날리는 멋진 역사 공간을 발견했다. 바로 경남 거제시에 있는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이곳은 2013년 조선 전몰수군의 명복을 기리기 위해 마련됐다. 당시 수군과 전함의 구조, 백성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유물이 다수 전시돼 있다.
사실 임진왜란 당시 승전과 패전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거제, 통영, 진주 지역에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역사 공간이 적지 않다. 한데 숱한 해전 중 잘 언급되지 않는 해전이 있다. 바로 임진왜란 첫 패전인 칠천량해전이다. 조선실록에 따르면 1597년 원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왜군에 대패해 전함 256척이 대부분 파손되고 수군 5500여 명이 전몰했다. 격전을 치른 후 조선의 남은 군선은 12척에 불과했다.
칠천량해전의 패배 이유로는 조선 내부의 정치적 갈등, 지휘관의 잘못된 전략 등이 꼽힌다. 승산이 있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이런 과오로 인해 일본 수군에 대패하고 말았다. 이 뼈아픈 패배 이후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이 없었다면 아마 조선은 망국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칠천량 패전을 관련 유물과 사료로 세세히 되살려 놓은 공원에서 큰 감동을 느꼈다. 역사는 승전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자랑스러운 역사 못지않게 실수한 역사도 냉철하게 응시하는 한국의 모습이 더 용기 있게 느껴졌다. 당시 공원을 추진한 취지를 찾아보니 “패배도 역사다. 왜 패전했는지 후세에 가르치는 것이 과업이라고 생각해 추진하게 됐다”고 한다. 방문객들 역시 패전지의 역사에서 더 큰 교훈을 얻어간다며 흡족해한다고 한다. 패배의 역사도 오래오래 기억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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