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끊임없이 경계를 넘어서려 한다. 예술가, 기술자, 범법자 모두 주어진 경계 밖으로 가려고 한다는 점에서 똑같다. 바람과 빗물에 내맡겨진 돌덩이나 주변 환경에 적응해 사는 동물들과 인간의 차이가 거기 있다. 인간의 그런 존재 방식을 일컬어 ‘실존(existence)’이라고 부른다. ‘밖에 서 있다’는 뜻이다. 동서양의 철학도 모두 생각 속의 경계 넘기다. 경계를 넘고 또 넘으면 무엇이 있을까? 모든 경계를 넘어선 자리에서 되돌아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낙시만드로스는 이런 의문을 품었다.》
‘최초의 과학자 겸 철학 저술가’
아낙시만드로스(기원전 610년∼기원전 546년)의 고향은 밀레토스이다. 그는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의 동료이자 제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제2의 스티븐 호킹’으로 평가받는 물리학자 로벨리는 그를 ‘최초의 과학자’라고 불렀다. 실제로 아낙시만드로스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현대 자연과학을 떠받치는 생각들을 벌써 2500년 전에 내놓았으니까. 그는 우주가 진화하고 그 안에서 생명도 진화한다고 생각했다.
아낙시만드로스에 따르면 우주의 시작에는 대폭발이 있다. 처음에 물, 불, 흙, 공기가 갈라졌고, 이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우주가 모습을 갖추어 나갔다. 불은 물을 말리고 물은 불에 물기를 전달했다. 그 결과 우주의 층상 구조가 자리 잡고 생명체가 생존할 만한 환경도 만들어졌다. 최초의 생명체는 물에서 생겼다. 그 뒤 물이 마르고 땅이 드러나자 새로운 환경에 맞춰 물에 살던 것들이 땅으로 올라와 육상동물이 되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아낙시만드로스는 사람이 “물고기를 닮은 모습으로” 생겨났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우주의 진화와 생명의 진화를 모두 우연의 산물로 여겼다는 점이다. ‘진화’와 ‘우연’을 빼놓고 현대 과학을 이야기할 수 없으니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의 과학자’가 아닌가.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는 경험 세계의 조각들에 매몰된 편협한 과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과학자이기에 앞서 보이는 것 너머를 생각하고 이를 기록한 최초의 철학적 저술가이기도 하다. 라파엘로가 ‘아테네 학당’에 필기구를 든 모습으로 그를 그려 넣은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아쉽게도 그의 저술은 사라졌지만, 한 구절이 남아서 “장중한 문체의 석문처럼”(니체) 2500년의 간격을 뛰어넘어 지금도 큰 울림을 준다.
“있는 것들은 어떤 것으로부터 생겨났다가 필연성에 따라 소멸하여 그것으로 되돌아간다. 그것들은 지은 잘못에 대한 벌과 대가를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서로 지불하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의 시작 ‘무한자’
사람을 닮은 신들을 끌어들이지 않고서 자연을 설명하려고 한 점에서 아낙시만드로스도 탈레스를 따랐다. 하지만 물에서 모든 것이 생겨났다는 스승의 생각에 그는 동의하지 않았다. 물이 모든 것의 시작이라면 불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반대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눈에 보이는 어떤 것을 끌어들여도 결과는 똑같다. 불을 모든 것의 시작으로 보면 물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것’을 모든 것의 시작으로 여겨야 하지 않을까?
물론 허무가 모든 것의 시작일 리 없다. 진짜 없는 것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이 될 수 있으면서 현실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것, 그런 것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이런 추리를 통해 찾아낸 원리에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자’라는 이름을 붙였다. 성질에서도, 양에서도 정해진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이렇게 찾아낸 무한자로부터 바라본 세계의 모습은 어떨까?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도 무한자와 같지 않다. 아무 경계도 없는 것이 모든 것의 원리라면, 그로부터 생겨난 것은 모두 경계를 갖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있는 것들’은 무한자에서 떨어져 나와 한계를 가짐으로써 존재한다. 물과 바람, 산과 바다,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에서 땅과 바다와 하늘을 정복하려는 인간까지 모두 경계를 가진 유한자이다. 그것들은 모두 ∼이면서 ∼이 아니다. 산은 산이지 물이 아니다. 물은 물이지 산이 아니다. 나는 나이고 네가 아니라는 이 부정의 관계를 벗어난 것은 없다.
무한자로부터 유한자들을 보는 아낙시만드로스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테네 학당’ 속 그의 일그러진 얼굴이 그의 속마음은 아닐까? 그는 정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무한자에서 일탈한 유한자들은 서로 대립한다. 이 대립이 싸움을 낳고, 싸움이 잘못을 낳는다. 내가 이 시각, 이 장소에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이 시각, 이 장소에 없기 때문이다. 또, 수많은 타자의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나의 생존이 가능할까? 물론 그 타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타자의 존재에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 경계를 가진 자들의 운명이다. 잘못과 불의로 이어지는 싸움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모두 “지은 잘못에 대한 벌과 대가를 시간의 질서에 따라 서로 지불”하고 무한자로 되돌아가야 한다.
인간 실존의 양면성
여기까지가 우리에게 알려진 아낙시만드로스의 철학이다. 그런데 그의 생각을 뒤쫓다 보면 인간의 실존이 난처한 문제로 등장한다. 정말로 경계를 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인간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많이 ‘잘못’을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닌가? 경계를 가진 것만으로도 잘못을 피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자신의 경계를 넘어서고 넓히려는 인간의 세계에서는 얼마나 많은 불의가 행해질 것인가? 다른 사람을 지배하고 동물들을 멸종시키고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인간의 실존적 본성 탓이 아닌가? 이를 피하기 위해 우리는 실존을 포기하고 화석이나 고목같이 살아야 할까?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질문을 이렇게 바꿔 보자. 인간의 실존 안에 다른 가능성은 없을까? 거기서 절망의 이유가 아니라 희망의 이유를 찾을 수 없을까? 경계를 넓힐 수 있는 자는 경계를 줄일 수도 있다. 경계를 지워 자기를 없애는 일, 경계를 허물어 타자를 품는 일, 즉 희생과 공존이 실제로 있다는 사실이 그런 믿음의 증거이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 체중을 줄이는 것이 가능하다면, 지구의 건강과 타자와의 공생을 위해 과도한 생산과 소비를 줄이는 것은 왜 불가능할까? ‘유한자의 잘못’을 없애지는 못해도, 그것을 줄이는 실존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경계를 넓히고 가진 것을 늘리는 데 마음을 빼앗기면 경계의 무상함도, 경계를 지운 세상의 모습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경계 너머의 공생을 노래한 효봉(曉峰) 선사의 오도송이 그런 마음을 일깨워줄지 모르겠다. “바다 밑 제비집에 사슴이 알을 품고/불길 속 거미집에 고기가 차 달이네/이 집안 소식 누가 알 수 있으리. 흰 구름은 서쪽으로 떠가고 달은 동쪽으로 달려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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