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은 중동 모래바람이 거셌던 날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는 윤석열 대통령을 찾아가 회담 및 오찬을, 국내 기업인 8명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서는 차담회를 가졌다. ‘미스터 에브리싱’이 국내에 머문 20시간 남짓 동안 온 나라가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했다.
그날 빈 살만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은 귀빈들이 있었다.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와 페터르 베닝크 ASML 회장이다. 윤 대통령은 국내 반도체 ‘투톱’인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초대해 양국 정상과 반도체 기업인들 간 차담회를 가졌다.
ASML은 반도체 생산라인에 필요한 첨단장비를 만들어 공급하는 기업이다. 그런데 이 장비 하나가 2000억∼3000억 원 수준으로 대형 선박 하나 값이다. 더구나 1년에 겨우 40∼50대밖에 만들지 못한다. ASML이 고객사를 찾아다니면서 “우리 장비를 써 달라”며 영업할 일은 없다. 반도체 기업들이 “제발 우리 것부터 만들어 달라”고 알아서 찾아오니까. 비즈니스 관계에서 통상적으로 돈을 주면 ‘갑’, 받으면 ‘을’이라 한다. ASML은 돈을 받는 쪽이지만 돈을 주는 쪽보다 결정권이 훨씬 센 이른바 ‘슈퍼 을’이다.
ASML의 진가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난과 반도체 기업들의 치열한 경쟁 속에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반도체 제조사들이 첨단 기술을 한 발이라도 앞서 상용화하려면 ASML 같은 장비업체들과의 협업이 필수적이어서다. 이재용 회장이 6월 친히 유럽으로 건너가 베닝크 ASML 회장을 만난 것도, 윤 대통령이 친히 차담회를 마련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일본의 산업용 로봇 제조업체 화낙도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하는 ‘슈퍼 을’이다. 전 세계적 스마트공장 확산 속에서 화낙의 로봇들을 향한 러브콜이 끊이지 않는다. 글로벌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1위 업체 대만 TSMC도 같은 부류다. 삼성전자가 추격에 나서고는 있지만 TSMC의 위상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다.
국내에도 ‘슈퍼 을’을 향해 가고 있는 기업이 여럿 있다. LG에너지솔루션, 삼성SDI, SK온 배터리 3사가 대표적이다.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전기차 판매량이 가파르게 늘어나니 안정적 배터리 수급은 완성차 업체들의 가장 큰 미션이 됐다. 업계에서는 “몇 년 전만 해도 실감이 안 났는데, 이젠 확실히 배터리가 ‘갑 같은 을’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이 나온다. 9월 미국 포드의 짐 팔리 최고경영자(CEO)가 방한해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을 만난 것도 같은 맥락이란 해석이다. 생산능력 기준 글로벌 1위 바이오의약품 위탁생산업체(CDMO)인 삼성바이오로직스도 강력한 을이 될 자질을 갖췄다. 미국 애플의 전략폰에 카메라모듈을 거의 독점 공급하다시피 하는 LG이노텍도 다크호스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는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지만 누군가에겐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수십 년간의 꾸준한 투자로 경쟁력을 키워온 한국산 ‘슈퍼 을’ 후보들이 제대로 잠재력을 터트릴 때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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