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일본은 인공지능(AI) 만화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철완아톰(우주소년 아톰)’ ‘정글대제(밀림의 왕자 레오·이상 한국 제목)’로 유명한 만화가 데즈카 오사무(1928∼1989)가 사후 31년 만에 ‘부활’한 것. 망자(亡者) 데즈카의 신작 ‘파이돈’은 AI와 후배 작가들의 협업으로 제작됐다. 데즈카가 생전 설립한 만화 제작사 ‘데즈카 프로덕션’이 AI에게 130여 편을 분석시켰다. 데즈카 특유의 이야기 전개 형식 100여 종에서 10여 개의 공통점을 도출했다. 그리고 캐릭터의 표정, 감정 표현, 연출 앵글까지 AI에게 ‘딥러닝’시켰다. 이를 통해 데즈카가 살아 있다면 냈을 법한 가상 신작을 만들어낸 것이다.
실패에 그친 데즈카 부활 실험
그러나 ‘파이돈’은 뉴스거리로 주목받는 데 그쳤다. 30페이지 분량도 채 안 되는 ‘시제품’ 형태였다. 몇 장 넘기다 보면 툭 끝나는 짧은 분량에 스토리나 캐릭터도 어설펐다. 적용된 AI 기술은 걸음마 단계였다. 데즈카 프로덕션의 작가들이 달라붙어 보완했지만 AI가 분석할 원천 데이터부터 부족했다. 두툼한 ‘아톰’ 종이 만화책을 넘기며 빠져들던 중장년층을 사로잡기에는 지나치게 짧았고, 스마트폰 화면을 넘기며 웹툰을 소비하는 젊은층에게는 ‘관심 밖’이었다. 수십 년 전 향수의 단편적 재현에 그쳤다.
일본에서 멈춰 선 반쪽짜리 실험이 한국에서 본격화한다. 최근 이현세 화백(66)이 만화 기획사 재담미디어와 손잡고 ‘AI 이현세’로 신작을 만들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1980년대 ‘공포의 외인구단’과 ‘아마게돈’, 1990년대 ‘남벌’ 등의 작품과 ‘까치 오혜성’ 캐릭터로 한국 만화계를 이끈 그의 파격 선언이다.
근래 한국이 세계 만화 시장의 주도권을 쥔 상황이어서 더 기대된다. 오랜 역사의 종이 만화는 20세기 미국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진화했다. 그러나 21세기에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이에 맞는 웹툰이란 형식을 선제적으로 만든 것이 대한민국이다. 1세대 종이 만화, 2세대 애니메이션 시대에 선진국 뒤를 쫓던 시절을 뒤로하고 한국 만화가 전세를 역전해 선진국 자리를 차지한 셈이다. 이제 3세대에 해당하는 웹툰을 틀어쥔 데 이어 4세대 ‘AI 만화 시장’까지 선점할 기세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모바일로 진화한 만화가 한국의 첨단 정보기술을 만났기 때문이다.
‘AI 이현세’는 ‘데즈카 프로젝트’와 근본부터 다르다. 우선, 데즈카는 죽었고 이현세는 살아 있다. 31년 전 숨진 데즈카의 아들, 손자뻘 후예들이 ‘선생님이라면 이랬을 것’이라고 추측하며 하는 작업과는 다르다. 살아 있는 이현세는 젊은층에게 익숙한 웹툰 시장에서도 현재 진행형 작가다. 네이버웹툰에 ‘늑대처럼 홀로’를 실제로 연재 중이다. 종이 만화부터 웹툰까지 다양한 포맷에 익숙한 이현세가 AI의 ‘n차’ 작업에 직접 참여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시스템을 고도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만화의 개념 바꿀 ‘AI 이현세’
더욱이 웹툰의 종주국 한국은 만화 빅데이터의 최강국이기도 하다. 한국의 웹툰 플랫폼은 미국, 프랑스, 독일,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1위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네이버웹툰의 경우 플랫폼 내 전체 창작자 수가 전 세계 600만 명을 아우르고 누적 작품 수는 약 10억 편에 달한다. 10개의 언어로 매일 웹툰이 쏟아진다. 이 어마어마한 창작 데이터가 오픈소스로 축적된다.
이 방대한 데이터를 AI에 학습시키면 불가능처럼 보이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미 네이버웹툰에서 베타서비스까지 선보인 ‘웹툰 AI 페인터’는 3년간 웹툰 약 12만 회차 분량에서 30만 장의 이미지 데이터를 추출해 학습시켜 만들어낸 툴이다. 터치 한두 번으로 인물, 배경의 채색이 가능하다. 직접 찍은 사진을 웹툰화시키는 ‘배경 자동 생성 기술’, 얼굴 사진을 올리면 바로 웹툰 캐릭터로 바뀌는 ‘얼굴 변화 기술’도 연구 중이다. 그림을 전혀 못 그리는 사람도 AI 도구를 이용해 웹툰 작가로 성공할 수 있는 시대가 목전에 왔다.
그림 초보도 웹툰을 그릴 수 있는 시대라면, 독보적 화풍과 뛰어난 상상력, 축적된 노하우를 가진 베테랑 만화가의 작품은 더 비약적인 발전을 할 수 있다. 이현세 작가는 44년간 창작한 만화 약 4174권 분량을 AI에게 학습시킬 예정이다. 우선 제작 주기가 현저히 빨라질 것이다. 이현세가 오랜 세월 그린 작화 습관을 학습한 AI는, 그가 단 두세 개의 선만 쓱쓱 그어도 바로 ‘외인구단’의 까치 오혜성이 투구하는 모습과 얼굴 표정, 스타디움 풍경까지 순식간에 완성해낼 수 있다. 따라서 몇 년에 걸쳐 하나씩 내던 작품을 1년에 여러 편 내는 식의 다작(多作)도 충분히 가능하다. 또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트렌드를 이현세의 그림체나 세계관과 결합시킨 새로운 장르의 작품을 만들어낼 가능성도 열린다. 작화뿐 아니라 스토리 구성에도 향후 AI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자극성-선정성은 걸러내야
과제도 있다. AI 만화가의 사후 작품을 과연 그 만화가의 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 하는 정체성 문제도 그중 하나다. 데즈카의 ‘파이돈’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도 거기 있다. 만약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편으로 새로운 시대의 독자들과 교감까지 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온다 해도 문제의 소지는 남는다. 당대 소비자의 취향에 맞추기 위해 AI는 어떤 독자가 어떤 그림에서 몇 초간 머무는지까지 분석하고 학습할 것이다. 만약 이런 데이터만 AI에 주입시킨다면 눈길만 잡아채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작품들만 양산될 수도 있다. 따라서 예술적 깊이를 얼마나 담아내고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 예술 장르로서 AI 만화의 장기 과제가 될 것이다.
이처럼 ‘AI 이현세’는 시대적 책임을 지닌 프로젝트다. 좋은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한국은 이미 주도하는 웹툰 창작 생태계에 ‘AI 웹툰 에이전시’와 ‘AI 웹툰 플랫폼’까지 연계해 세계 만화계를 이끄는 빅 픽처를 그려볼 수 있다. 꿈같은 일이겠지만 1970∼80년대 ‘독고탁’ 신드롬을 일으킨 이상무 화백(1946∼2016), ‘짱구는 못 말려’ 연재 도중 사망한 우스이 요시토(1958∼2009)를 비롯한 세계 유명 만화가들을 우리의 플랫폼에 우리의 기술력으로 되살려내는 것 말이다. 종이 만화, 애니메이션, 웹툰으로 발전해온 인류의 만화 역사가 ‘AI 만화’로까지 발전하는 문턱에서 열쇠가 우리 손에 있다. 이 길은 한국 만화는 물론이고 세계 콘텐츠 산업이 나아갈 방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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