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함’의 연대[2030세상/김지영]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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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김지영 스타트업 투자심사역(VC)·작가
학창 시절 교실은 두 개의 파벌로 나뉘어 있었다. “너 god야, 신화야?” 대답을 강요받을 때마다 질문자의 의중을 파악하느라 애를 먹었다. 슬금슬금 눈치를 보다 결국엔 더 친해지고 싶은 쪽의 답안을 따라가곤 했다. 친해서 같은 취향을 갖게 된 것인지 취향이 같아서 친해진 것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그때 처음 알았다. 같은 대상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갖게 되는 극도의 유대감을.

이후 입시와 취업을 거치며 ‘취향’이라는 키워드는 자취를 감췄다. 물리적, 경제적 자립을 확보하고 나서야 본격적 탐색이 시작됐다. 분명한 색을 가진 멋진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 가진 색이 구체화될수록 간절해지는 것은 같은 색을 가진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 그리하여 나의 20대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는 여정이었다면, 30대는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을 찾는 여정이 되어 가고 있다.

대표적인 대상으로 드라마 ‘멜로가 체질’이 있다. 종영한 지 3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잠이 덜 깬 아침이면 수다 떨듯 틀어놓고, OST 도입부만 들어도 가슴이 뛴다. 수십 번은 봤던 장면임에도 매번 볼 때마다 안 들리던 대사가 들리고, 안 보이던 캐릭터가 보인다. 당연히 좋아한다는 사람이 있으면 눈을 반짝이며 다시 보게 된다. 설령 안 맞는다 여겼던 사람조차 그간의 경험을 오해로 단정하게 한다.

그러다 최근 대본 리딩 모임에 들어갔다. 돌아가며 배역을 맡아 연기도 하고, 캐릭터와 작품에 대한 분석을 공유하는 모임이었다. 근래 활황인 여타 커뮤니티들처럼 모객을 위해서라도 복수 작품을 내세울 만한데 놀랍게도 (시청률도 높지 않은) ‘멜로가 체질’ 한 작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떠듬떠듬 대사를 흉내 내며 첫 모임을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뛰었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올까.

처음엔 쭈뼛쭈뼛 낯을 가리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와 장면, OST를 이야기하며 순식간에 공감대를 형성한다. “어, 저도 그 장면 제일 좋아해요!” “그거 아세요? 이 장면 찍을 때….” 모두가 같은 열병을 앓다 보니 대본집은 곧 성서가 되어 대화 중간중간 신(scene)과 대사를 인용한다. 가령 내가 “가슴이 폴짝폴짝 뛴다”고 하면, 저쪽에서 “나풀나풀 뛴다”고 받아치는 식이다(‘멜로가 체질’ 2부 신 넘버 16 인용).

그제야 잊었던 감각을 깨친다. 같은 대상을 좋아한다는 것은 공통된 배경지식을 공유하는 일이었다.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받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것이었다. 함께 좋아하는 사람을 찾고 싶었던 마음은 사실, 같은 맥락에서 울고 웃을 수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대상 없는 그리움이 가실 때까지 나는 좋아하는 드라마 얘기가 나올 때마다 누군가 ‘멜로가 체질’을 지목해 주길 두근대며 기다리겠지.

어느덧 마지막 모임을 앞두고 있다. 음주 수다를 즐겨 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 다음 모임 땐 각자 선호하는 알코올을 준비해 오기로 했다. 넘치는 수다 덕에 대본 리딩의 비중이 예상보다 많이 낮아지긴 했지만, 드라마 속 대사처럼 “맛있게 떠들고 맛있게 먹”는 것으로 연기를 대신한다. 그런…거다.

#취향#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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