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에브리싱(Mr. Everything)’으로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가 17일 한국에서 약 20시간 머물며 40조 원 규모의 ‘투자 보따리’를 꺼냈다. 37세 사우디 왕세자가 멀리까지 찾아온 건 그가 원하는 게 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는 윤석열 대통령에게 “사우디 비전 2030의 실현을 위해 한국과 협력을 강화해 나가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왕세자가 언급한 ‘사우디 비전 2030’은 석유 생산이 꼭짓점을 찍고 급감하는 ‘피크오일(peak oil)’을 대비한 미래 프로젝트다. 670조 원을 투자해 사우디 북서부에 스마트시티를 건설하고 자본, 인재, 관광객을 끌어들이려는 ‘네옴시티’ 사업이 핵심 프로젝트다. 네옴은 ‘새로운 미래(Neo+Mustapbal·아랍어로 미래)’를 뜻한다.
사우디는 세계 최대 석유수출국이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석유가 사라지면 국가 경제가 일순간 붕괴하고 왕국의 존립 기반도 무너진다. 하루 16시간을 일하며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국을 이끈 윈스턴 처칠 총리와 손자병법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젊은 사우디 왕세자가 이 ‘예정된 미래’를 모를 리 없다.
전례도 있다. 산유국 노르웨이는 경제 다각화로 석유 의존에서 벗어났다. 1966년 유전을 발견한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도 항만, 공항 등에 투자하고 시장을 개방해 ‘석유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이제는 두바이 국내총생산(GDP)에서 석유 비중이 1% 미만이다. 카타르는 21일 월드컵 개최에 성공하며 국가 이미지를 새로 만들고 있다. 사우디도 2030년 세계박람회(엑스포) 유치를 추진하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한국을 찾아 “수교 이래 한국 기업들이 사우디의 국가 인프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말했다. 1970, 80년대 중동에서 땀을 흘린 ‘한강의 기적’ 세대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 것이다. 당시 중동에서 한국 건설 노동자들은 ‘코리안 아미(Korean Army)’로 불렸다. 집단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며 공기를 앞당기는 그들이 중동 사람들에겐 일사불란하고 신속한 군대처럼 보였다. 그들의 땀과 눈물이 오늘날 빈 살만을 한국으로 이끈 셈이다.
한국은 과거 덕분에 먹고살면서도 정작 후손들에게 물려줄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데는 소홀하다. 주력산업인 반도체가 미국 대만의 견제와 중국과 일본의 맹추격을 받고 있는데도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법안들은 ‘대기업 특혜’라는 낙인이 찍혀 석 달 넘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120조 원이 투자될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물을 끌어오는 시설 인허가에 1년 6개월이 걸린다. 정부가 서비스업 산업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발의한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11년째 ‘재추진’만 반복하고 있다.
올해 무역적자가 400억 달러를 넘고 1인당 GDP가 20년 만에 대만에 추월당할 판이다. 인구는 줄고 빠르게 늙고 있다. 내년엔 1%대 성장 전망도 나온다. 경제 전문가의 97%가 “한국 경제가 위기 상황”이라는데 국회는 정쟁으로 예산안 심사조차 제대로 못 하고 있다.
두바이 지도자였던 라시드 빈 사이드 알막툼은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낙타를 탔다. 나는 벤츠를 타지만 증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수 있다”며 석유 없는 미래를 대비했다. 덕분에 그들의 후손들은 아직 ‘벤츠’를 탄다.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교과서에도 실리는 ‘한강의 기적’ 과실을 먹고 자란 한국 정치 지도자들은 후손들에게 정쟁과 갈등만 물려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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