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 광고가 뜨는 이유[광고 스토리/허진웅]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3일 03시 00분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허진웅 이노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위기에 놓인 히어로가 있다. 악당의 공격에 쓰러지려는 순간. 홀연히 나타난 누군가가 그를 구한다. 놀라는 주인공. “당신은 누구죠?”라고 물으면, 상대방이 가면을 벗으며 말한다. “나는… 다른 차원에서 온 너 자신이야.”

멀티버스(multiverse·다중 우주). 우주엔 수많은 차원이 있고, 각 차원마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또 다른 나’가 수없이 존재한다는 가설. 과학에서 말하는 멀티버스는 굉장히 어려운 개념이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영화배우인 나는 어떨까? 무림 고수인 나는 어떨까? 결혼을 한 나는 어떨까? 결혼을 안 한 나는 어떨까?”

‘만약에’로 시작하는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는 쉽고 매력 만점이다. 세탁소 주인인 ‘나’가 할리우드 여배우인 ‘나’를 맞닥뜨리는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최근 화제다.

멀티버스 개념을 처음 콘텐츠의 세계로 가져온 건 만화가들이었다. 1950년대 중반 미국 만화 잡지사 DC는 유행 지난 ‘플래시’라는 캐릭터를, 주인공을 바꾸어 리부트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새롭게 바뀐 인물이 “내가 플래시야” 하고 등장하자 사람들은 “그럼 그 전 플래시는 도대체 어디 간 건데?”라고 잡지사에 묻기 시작했다. 대답이 마땅찮았던 편집부는 고민 끝에 “아, 이 플래시는 다른 차원의 플래시야”라는 ‘신박’한 답을 내놓았다. 멀티버스는 그렇게 할리우드 히어로 시리즈의 중심 개념이 되었고 이젠 물리학도가 아닌 일반인도 가볍게 받아들이게 됐다.

그럼 멀티버스는 광고에서는 어떻게 사용되고 있었을까? 광고의 고전적 작법 중에 ‘생활의 단면(slice of life)’이 있다. 특정 맥주를 마시는 수많은 사람들, 특정 세제를 쓰는 수많은 주부들을 짧게 많이 보여주는 방식. ‘아,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쓰는 제품이니 믿고 살 수 있겠군’ 하는 생각을 자아내려는 거다. 그러나 병렬적 반복만 계속되면 심심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 상황에 멀티버스를 도입하니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한 인물이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맥주를 시원하게 마신다. 다음 장면은 해저 깊은 곳에서, 달 위에서, 밥 먹다가, 화장실에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수많은 자아가 끈기 있게 한 맥주만을 마시는 이야기. 다음은 세제. 흰옷 입은 남자가 총 맞고 피를 흘리는 순간, “이 세제로 빨면 깨끗해져요!”라고 소리 친다. 스파게티를 흘렸을 때도, 말을 타고 가다가도…. 한국에서는 배우 성동일이 등장하는 창호 광고가 비슷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이 창문이 좋아!”라고 말하는 창문 광고의 멀티버스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또 다른 차원의 ‘나’는 광고인이다. 그가 말했다. 멀티버스 스타일의 광고가 나오면 이렇게 봐주시면 좋겠다고.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누가 맥주를 마셔!” 하는 너무 가혹한 잣대 대신, 저 험난한 상황에 주인공을 앉혀 놓고 제품을 광고하려는 담당자의 절박한 뻔뻔함과 “그러니까 한번 생각이나 해주세요, 제발”이라는 광고인의 절규가 저런 형태로 드러났구나, 귀엽네, 하고 너그럽게….

#멀티버스#멀티버스 광고#광고인의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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