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항(港) 명소 카이트베이 요새 근처에서는 궂은 날씨에도 방파제 공사가 한창이었다. 거푸집이 여기저기 보였고 레미콘 차량이 관광객 사이로 쉼 없이 드나들었다. 요새 바로 밑에는 1400만 달러를 들인 해안 침식 방지용 콘크리트블록 5000여 개가 쌓여 있다. 이 블록들로도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에 모자라 방파제를 추가하는 공사다. 17년째 요새 주변에서 관광용 보트 뱃사공으로 일하는 오사마 씨(39)는 “겨울인데도 비가 많이 오고 파도가 거세져 일하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중동이 이상기후(異常氣候)로 몸살을 앓고 있다. 수십 년 안에 해수면이 상승해 수백만 명이 살 곳을 잃게 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경고에서부터 광활한 곡창지대로 해수가 역류해 식량 위기를 가중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여름에는 이상고온과 가뭄, 유례없는 폭우까지 겹쳐 중동뿐 아니라 국제사회도 우려하고 있다.
“나일강 삼각지 30% 잠길 수도”
나일강과 지중해가 만나는 삼각지 서쪽 끝자락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제2 도시이자 가장 큰 항구도시다. 약 1500년 전 술탄이 지배하던 시절 외세를 막기 위해 지은 카이트베이 요새와 고대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 등으로 유명하지만 미국 마이애미, 중국 상하이와 함께 지구온난화 피해가 가장 큰 지역으로 꼽힌다.
유엔 산하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에 따르면 알렉산드리아는 매년 3mm씩 지중해 밑으로 가라앉고 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2015, 2018, 2020년에 바닷물이 범람해 홍수가 일어난 것도 이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그때마다 많은 이재민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바닷물에 침식돼 붕괴 위험이 커진 해안가 건물 일부 주민은 이사를 가야 했다.
이날 알렉산드리아 해변에서는 겨울이면 높아지는 해수면과 거세지는 파도를 피해 파라솔과 일광욕 평상 등 해수욕 장비가 모두 치워졌다. 여름에 성행한 야외 식당들도 대부분 철수했다. 해산물 전문식당을 하는 마리얌 씨(55)는 “해가 갈수록 파도가 거세져 겨울에는 실내 식당 중에도 문을 닫는 곳이 늘고 있다”며 “문을 열어도 혹시 피해가 생길까 봐 불안해하며 장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집트에서 가장 비옥한 나일강 삼각지 유역은 이집트 식량 생산의 50%를 담당한다. 하지만 1960년대 이후 해안이 내륙으로 약 3km까지 밀려들어와 많은 토지가 잠겼다. 삼각지 해안도시 로제타에서는 과거 토마토 가지 호박 등을 재배했지만 최근에는 망고나 시트러스같이 염분에 강한 농작물을 기르고 있다. 인근 지역에서도 고온 현상과 토지 염분 증가로 매년 수확량이 줄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진다.
IPCC에 따르면 ‘최악’의 경우 2050년까지 삼각지 유역 해수면이 1m 상승해 알렉산드리아를 포함한 이 지역의 약 3분의 1이 가라앉는다. 해수면이 1m 상승하면 서울 면적(605km²)의 10배가 넘는 해안지역 6900km²가 잠긴다. 지중해 수면이 50cm 상승해도 알렉산드리아의 30%가 물에 잠길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면 150만 명이 살 곳을 잃고 19만5000명이 일자리를 잃으며 재산 피해는 30조 달러로 추산된다는 예측도 있다. 물론 해수면이 30년 내에 이렇게까지 상승할 확률은 극히 낮지만 극단적으로 상정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아흐메드 압델카데르 이집트 해안보호청장은 현지 언론 인터뷰에서 “기후 위기는 더 이상 경고 수준이 아닌 현실이 됐다”고 주장했다. 유엔은 나일강 삼각지 유역 해수 역류가 심해지면 가뜩이나 식량 위기인 이집트 식량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라진 봄바람 ‘캄신’
이상기후는 나일강 삼각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내륙인 수도 카이로는 여름에 과거보다 더 덥고 습해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매년 봄에 불던 캄신(khamsin·이집트와 이스라엘에 부는 건조하고 더운 모래바람)이 관측되지 않았다. 지난달에는 카이로에 때 이른 폭우가 이틀간 내려 도시 곳곳이 마비되기도 했다.
다른 중동 국가도 상황은 비슷하다. 유니세프에 따르면 극심한 물 부족을 겪는 17개국 중 11개 나라가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있다. 이상기후가 물 부족을 심화시킬 수도 있는 실정이다. 세계에서 가장 건조한 국가로 꼽히는 요르단에서는 물 부족 현상이 심해지면서 지난해 이스라엘로부터의 물 수입량을 두 배로 늘렸다. 세계은행은 이상기후 현상을 방치하면 이라크에서는 2050년 평균기온이 섭씨 1도 상승하고 연간 강수량은 10% 줄어 수자원이 20% 이상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유엔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이라크는 최근 2년간 농작물 생산량이 40% 줄었다.
기후변화에 취약한 이들 지역은 난민 문제도 심각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전 세계 난민 90%가 기후변화에 취약한 국가 출신이다. 에이미 포프 국제이주기구(IOM) 부국장은 AFP통신에 “중동과 북아프리카에서 자연재해가 반복돼 지난해 300만 명이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국제사회 지원만 기다릴 뿐
중동 각국이 기후변화에 손놓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이집트 정부는 몇 년째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나일강 삼각지 연안을 따라 방파제를 쌓고 있다. 또 바닷물에 침식돼 쓸려 나가는 모래를 보강하기 위해 매년 모래 수백만 t을 해안가에 채워 넣고 있다. 기자가 찾은 이날 카이트베이 요새 근처뿐만 아니라 알렉산드리아 곳곳에서 해안을 따라 방파제 공사가 한창이었다.
하지만 기후변화에 더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른 에너지 및 식량 위기에 따른 경제난까지 겹쳐 해안 침식 피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이집트는 북부 지중해 연안이 총 연장 1000km에 달한다. 경제 위기를 감안하면 이집트 혼자 지중해 수면 상승으로 인한 피해를 감당하기 어렵다. 알렉산드리아는 도시 배수(排水) 능력을 보강했지만 빠르게 증가하는 강수량에 미치지 못해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압델카데르 해안보호청장은 “이집트 혼자 아무리 방파제를 쌓고 모래를 쏟아부어도 경제적, 물리적으로 역부족”이라고 탄식했다.
국제사회 협력은 현재로서는 요원하다. 18일 이집트 휴양도시 샤름엘셰이크에서 폐막한 유엔 기후변화협약 제27차 당사국 총회(COP27)에서는 사상 최초로 기후변화가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는 자연재해로 인한 경제적, 비경제적 손실을 의미하는 ‘손실과 피해’ 기금 조성에 합의하는, 역사적인 진전을 이뤘지만 기금 모금 주체와 지원 대상은 누구인지, 어느 나라가 얼마씩 내야 할지, 어느 나라에 얼마나 지원할지 등등 구체적인 이행 방안 논의는 내년으로 미뤄졌다. 지구 온도 상승폭을 산업화 전보다 섭씨 1.5도로 제한하자는 지난해 합의에 대한 행동 계획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외신은 일부 개발도상국이 기금 마련 합의 도출을 위해 지구 온도 상승폭 제한을 양보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포프 IOM 부국장은 “국제사회가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기후변화 피해 주민에게 제대로 된 음식과 살 곳, 경작지를 마련해 주지 않는다면 이들에게는 난민이 되는 것 말고는 남은 게 없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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