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은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 대해 “무난하게 잘 진행이 됐다”고 했다. 첫 만남이니 박하게 평가를 내릴 이유는 없다. 다만 한중 관계가 앞으로 ‘무난(無難)’의 길이 아니라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고난(苦難)’의 길을 걷게 될 것이란 우려는 떨치기 어렵다.
시 주석은 “정치적 상호 신뢰를 증진해야 한다”고 했다. 뒤집어 말하면 역대 한국 대통령들은 믿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어느 대통령은 천안문 망루에 오르고, 어느 대통령은 “큰 봉우리, 작은 봉우리” 운운했지만 사드 배치 등 자기 나라의 핵심 이익을 건드렸을 땐 가차 없이 보복을 했던 그가 한국의 새 대통령을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과거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 셈이다. “경제협력을 정치화하고, 범안보화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는 말은 마치 중국 천하(天下)에 들어올래, 말래 하는 식의 압박으로 들린다. 진짜 황제라도 된 듯한 태도 같다.
이런 중국을 뒷배로 둔 북한 김정은은 영악하다. 작금의 정세를 핵능력 고도화를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있다. 어떤 짓을 해도 미국과 경제 안보 패권을 놓고 한판 승부에 돌입한 중국이 북한에 등을 돌릴 일은 없다고 본다. 중국은 북핵 문제로 미국의 전력을 흩뜨려 놓는 게 낫다는 판단도 할 것이다. 제국 본능을 드러낸 시진핑과 김정은의 핵을 매개로 한 전략 동맹이다.
한중 관계도, 북핵 문제도 지금처럼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은 적이 있었던가 싶다. 시 주석이 북핵 문제에 짐짓 먼 산 바라볼 때 북한은 괴물 ICBM을 보란 듯 쏘아 올렸고 성공했다. 말 그대로 게임의 양상이 달라지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6번의 핵실험을 했지만 북한은 이제 5년 만의 7차 핵실험을 눈앞에 두고 있다. 전략핵, 전술핵 완성 단계로 볼 수밖에 없다.
흥분해서도, 호들갑을 떨어서도 안 된다. 다만 괴물 ICBM의 대기권 재진입 역량은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거나 미국과 큰 담판을 지으려는 협상용이라는 등의 분석만 되뇌는 건 너무 한가한 것 같다. 게임의 본질이 바뀌었으면 대응의 본질도 바뀌어야 한다. 멍하니 있다가 자칫 한 방에 훅 가거나 휘청댈 수도 있는 위태로운 형국 아닌가.
최근 민간 레벨이나 정치권 일각에서 한시적 핵무장이나 전술핵 재배치, 전술핵 운용 협의권을 갖는 나토식 핵공유 방안 등의 주장이 제기됐다. “이스라엘은 미국 지지를 잃을지라도 핵무기 보유로 아랍국들로부터 안보를 지키고자 했다”는 미 전문가의 평가를 인용해 우리도 ‘이스라엘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무장한 예언자’가 살아남는다는 논리다.
핵 이슈는 복잡하고 예민하다. 한반도가 실제 핵 전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정권에 따라 노선이 오락가락하는 한국 정치 상황을 미국은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국론이 격렬히 갈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미국의 확장억제에만 기대면 되는지, 미국 도시가 공격 위기에 처해도 우리 안보는 보장되는지, 우리 군의 3축 체계는 탄탄한지 등에 대한 토론은 더 활발히 전개돼야 한다.
큰 전략은 열망과 수단의 균형에서 나온다. 우리 여건에 맞는 적절한 방안을 깊이 고심할 수밖에 없다. 여러 옵션에 대한 모호함도 전략이 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 북한의 군사 도발 등 갖가지 시나리오를 상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지금은 큰바둑을 둘 때다. 자잘한 국내 정치 싸움에 휘말려 정신을 허비할 때가 아니다. 동아시아에 리더의 혜안과 전략 대결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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