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난 게 아니다’라는 거짓말, ‘노력하면 다 된다’는 거짓말[광화문에서/황규인]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1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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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황규인 스포츠부 차장
‘타고났다.’ 스포츠 스타 선수 대부분이 듣기 싫어하는 말이다. “열심히 땀방울을 흘려서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 노력을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타고난 신체 조건부터 남다른 선수들 발언에 유독 노력을 강조하는 표현이 많은 이유다. 일본과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안타를 총 4637개 때린 이치로(49)는 “일본에서 나보다 연습을 많이 한 선수는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이치로도 키 180cm로 동갑내기 일본인 남성(171cm)보다 9cm가 크다.

‘타고났다.’ 예능 프로그램 ‘시켜서 한다! 오늘부터 운동뚱’에 출연한 개그우먼 김민경 씨(41)를 보면서 이 말이 절로 떠올랐다. 여러 종목에서 ‘선수급 재능’을 선보인 김 씨는 결국 실탄사격 국가대표로 뽑혀 2022 국제실탄사격연맹(IPSC) 핸드건 월드 슛 대회에 출전했다. 전 세계 100여 개 나라에서 1600명이 참가하는 대회다.

어릴 때부터 한 우물만 판 선수는 몰라도 불혹이 넘은 나이에 시작해 1년 만에 국가대표 레벨까지 올랐다면 ‘타고났다’고 평가해도 크게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김 씨의 국가대표 발탁 소식을 전한 기사에도 ‘재능보다 노력’이라는 표현이 가득하다. 김 씨가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단, 타고난 게 없어도 노력만 하면 되는지는 다른 문제다.

‘타고나는 것’의 대명사인 외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예쁘고 잘생긴 이들 가운데는 ‘외모보다 내면이 더 중요하다’고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생 외모 때문에 차별 대우를 받은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는 것도 마찬가지다. 타고난 게 많은 이들은 노력을 하면 할수록 성장하는 경험을 해봤기에 ‘노력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공한 사람 대부분은 이치로처럼 자연스레 ‘나는 내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진심으로 믿게 된다. 부모를 잘 만난 덕에 ‘3루에서’ 태어난 이들도 마찬가지다.

정말 노력만으로 충분할까. 미국 영화 ‘19번째 남자’에서 마이너리그 최다 홈런 기록(247개)에 도전하는 크래시는 이렇게 말한다. “시즌을 치르는 6개월 동안 일주일에 딱 한 번씩만 ‘바가지 안타’(행운의 안타)가 나오면 0.250이던 타율이 0.300으로 오른다. 누군가 평생을 마이너리그에서 보낼 때 다른 누군가는 그 바가지 안타 덕에 (메이저리그 명문 팀) 뉴욕 양키스 유니폼을 입는다.” 크래시는 마침내 247번째 홈런을 날리지만 이를 보도한 신문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는 내용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1988년 6월 개봉한 이 작품은 ‘역사상 최고의 스포츠 영화’를 뽑을 때 빠지지 않고 이름을 올린다. 재능을 타고난 데다 행운까지 뒤따랐던 메이저리그 스타들의 화려함보다 언젠가는 찾아올지 모를 기회를 기다리는 마이너리그 선수들 모습이 우리 대부분의 삶과 더 닮았기 때문일 거다. 그래서 묻고 싶다. “여러분의 247번째 홈런은 무엇인가요? 여러분은 어떤 바가지 안타를 기다리고 계신가요?”

#타고난 게 아니다#노력하면 다 된다#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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