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경험의 산물이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의 위대한 소설들은 시베리아 유형이라는 경험의 산물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그것이 온당한 말일까. 한국이 낳은 위대한 작곡가 윤이상은 그러한 일반화가 얼마나 잔인한 말일 수 있는지를 생생히 증언한다.
그는 납치돼 고문을 당했던 경험이 그의 “예술을 더 넓은 차원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예술은 그런 경험이 있든 없든 그것과는 독립된 것”이라고 말했다. 질문자인 독일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스스로도 나치에 대한 저항활동으로 인해 옥에 갇힌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은 그것이 없었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세상을 체험하게 하고 그의 소설을 풍요롭게 했다. 고통스럽지만 소중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윤이상에게 그런 질문을 한 것이다. 더욱이 윤이상은 옥중에서 ‘나비의 미망인’이라는 오페라를 작곡했고 나중에는 첼로협주곡까지 작곡했다. 린저의 입장에서 보면 지극히 상식적인 질문이었다.
그러나 윤이상은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는 예전에 한국인들이 민간요법으로 만들어 쓰던 토끼 오줌 약에 관한 비유를 들었다. 오줌을 받으려면 “토끼를 양철 뚜껑을 덮은 상자에 집어넣고 그 위에서 두드립니다. 그러면 토끼가 놀라서 오줌을 지립니다. 내가 음악을 뽑아내기 위해서 갇힌 토끼입니까?”
예상치 못했던 답변이었다. 린저는 그가 죽음과 대면하는 첼로협주곡을 쓴 것은 옥중에서 죽음과 대면한 경험이 아니었다면 쓸 수 없었을 거라고 맞받았다. 그러나 그의 답변은 확고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걸 썼겠지요.” 그렇게 고통스러운 경험은 하지 않는 편이 좋으며 자신은 “토끼장 속의 토끼”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의 말은 내면에 있는 상처가 내는 소리였다. 지금도 “심문 받고, 고문 받고, 감시당하는 무서운 꿈”을 꾸게 만드는 상처의 소리. 예술이 경험의 산물이라는 일반화가 누군가에게는 이렇듯 잔인한 말이 된다. 설령 그게 맞는 말이라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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