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사업자에게 늘 아쉬운 것이 시간이다. 조직에서 나오는 순간 사고 체계가 바뀌는지 일을 거절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일상의 질이 떨어진다. 시간은 커가는 아이들에게도 부족하다. 특히 부모에게 할애하는 시간. 다 같이 모여 밥 한번 먹자고 해도, 여행 한번 가자고 해도 “안 돼” 하고 거절당하기 일쑤다. 둘째가 초등학교 4학년인데 반 수학 평균 점수가 80점이 넘는단다. 놀랐다. 100점도 있고, 20점도 있고, 빵점도 있어야 정상적인 거 아닌가? 그런 학급에서 아이들의 심리적 긴장도가 얼마나 높을까 싶어 ‘하, 우리 애들은 어째야 하나?’ 걱정이 앞섰다. 경북 예천으로의 여행은 그렇게 계획됐다. 다 같이 모여 밥 한번 먹기도 힘든 나날이 쌓이면서 이건 아니잖아, 싶었던 거다. 옆에 있는 문경엔 자주 갔으면서도 예천은 처음이라 숙소 하나만 보고 간단히 결정했다.
예천에서 찾아간 곳은 회룡포마을이 유일했다.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과 금천이 흘러들어 농경지가 비옥한 땅. 가을 햇살을 받아 잔물결이 반짝였고 주변으로는 갈대가 흐드러지게 엉켜 있었다. 날 선 기운 없이 평화롭고 잔잔한 비무장지대가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냇가로 내려가려니 갈대숲에 있던 꿩 두 마리가 푸드덕 날아올랐다. 황톳길에서는 아이랑 달리기도 했는데 제법 긴 시간 동안 그곳을 지나는 차는 한 대뿐이었다. 그곳이 더 좋았던 건 언 땅을 비집고 푸릇푸릇 들판 가득 얼굴을 내민 보리 새싹 덕분이었다. 보리는 파종 시기에 따라 봄보리와 가을보리로 나뉘는데 11월은 가을보리가 쑤욱 하고 땅 위로 올라오는 달이다. 분명 겨울이면서도 생명력으로 찬란한 봄이 한쪽 땅에 가득한 풍경은 아름답고도 신비로웠다. 차를 타고 달리는 길. 들판에는 볏짚을 동그랗게 말아 놓은 대형 ‘마시멜로’가 가득했다. “어디 찍고 가야 할 곳이 없으니까 오히려 좋다.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살고 싶을 때도 좋겠어.” 예천 여행 이틀째에 아내가 한 말이다.
세련된 커피숍도, 우뚝한 명승지도 많지 않은 그곳을 여행하면서 많은 옵션 중 한 곳을 택하는 것도 자유지만 복잡한 선택지 없이 명료한 단순함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 역시 또 다른 자유의 감각임을 알게 됐다. ‘심심한’ 땅이야말로 귀한 땅이라는 것도. 그저 너른 들판은 왜 명소가 아닌가. 나의 생활은 계속 채워야 하는 일에 가깝다. 인스타그램도 채워야 하고 기획안과 제안서, 전시 일정도 채워야 한다.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건 그렇듯 늘 무언가를 채워야 하기 때문일 거다. 예천에서는 채우려고 애쓰지 않았다. 절로 그렇게 됐다. 어느 때는 ‘인풋’이 없어야 더 좋은 ‘아웃풋’이 만들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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