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장택동]1139채 ‘빌라왕’의 죽음

  • 동아일보
  • 입력 2022년 12월 13일 03시 00분


코멘트
10월 서울 종로구의 한 호텔에 장기 투숙 중이던 40대 김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김 씨는 무려 1139채의 빌라와 오피스텔을 보유한 ‘빌라왕’이었다. 그는 전세를 끼고 집을 사는 ‘갭투자’ 방식으로 엄청난 규모의 빌라를 사들였다. 하지만 세입자 수백 명에게 전세금을 돌려주지 못해 경찰의 수사를 받던 중이었다. 김 씨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세입자들은 보증금을 받아내기가 더 막막해졌다.

▷전세를 얻을 때 기본적인 안전조치는 확정일자를 받는 것이다. 하지만 등기부등본을 살펴봐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까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전세금 반환 보증보험에 가입했다면 세입자로서는 그 나름대로 철저하게 대책을 세운 셈이다. 김 씨는 62억 원의 세금을 체납한 상태였지만, 보증보험에 가입한 세입자 200여 명은 보증금을 받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김 씨의 사망으로 상황이 복잡해졌다.

▷주택도시보증공사는 보험 가입자에게 먼저 보증금을 준 뒤 집주인에게 소송을 걸어 돈을 받아낸다. 그런데 집주인이 사망하고 상속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소송 대상이 없으므로 보증금도 지급하지 않는다. 보험에 든 세입자라도 상속 문제가 정리될 때까지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더욱이 보증보험 미가입자들은 살던 집이 경매를 통해 낙찰돼야 보증금을 받을 수 있어 사정이 더 딱하다.

▷문제는 김 씨처럼 여러 채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빌라 3400여 채를 구입해 전세 사기를 벌이다 9월 구속된 권모 씨 일당은 ‘빌라의 신(神)’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수도권에 100채 이상의 빌라를 가진 사람이 30명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대부분 갭투자로 빌라를 매입했고, 정상적인 임대업자가 아닌 것으로 의심되는 사례가 적잖다. 언제 어디서 또 다른 전세 사기 폭탄이 터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특히 신축 빌라는 시세를 파악하기 어려워서 부동산 거래 경험이 적은 젊은층이 적정가보다 비싸게 전세를 얻는 경우가 많다.

▷집값이 하락하면서 빌라의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은 전국 평균 82.2%에 달한다. 집을 팔아도 보증금을 제대로 받기 어려운 ‘깡통 전세’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에서 전세 사기까지 판을 치면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보증금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는 서민들이 늘어나게 된다. 엄중한 처벌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예방이다. 전세 계약을 맺기 전 집주인의 세금 체납 여부 등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부터 서둘러 처리해야 한다. 빌라 전세 시장이 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집값 하락#빌라왕#갭투자#깡통 전세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