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에는 김진표 국회의장을 대신해 김영주 부의장이 의사봉을 잡고 있었다. 김 부의장은 이날의 63번째 안건인 한국전력공사법 개정안의 투표 결과를 발표했다. 투표에 걸린 시간은 단 28초.
“재석 203인 중 찬성 89인, 반대 61인, 기권 53인으로서 한전법 개정안은 부결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투표 결과에 김 부의장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본회의장도 술렁였다. 부결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8초 만에 끝난 투표 결과 한전은 파산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한전이 파는 상품은 전기다. 문제는 그간 한전은 전기를 생산 원가보다 싸게 팔았다는 점이다. 전기요금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커 역대 정부마다 전기요금 인상을 억눌러왔기 때문이다.
원가보다 싸게 팔면 쌓이는 건 적자뿐이다. 한전의 올해 3분기까지 누적 적자는 22조 원. 여섯 분기 연속 적자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적자에 대응하는 방법은 빚밖에 없다. 지금까지 누적된 한전의 회사채는 무려 67조 원이다.
한전의 회사채 발행 한도는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의 2배’로 정해져 있는데, 곧 이 한도를 넘어설 상황이 됐다. 일단 회사채 발행 한도를 ‘최대 6배’로 높인 것이 한전법 개정안이다.
하지만 개정안이 부결됐으니, 이제 한전은 더 이상 빚을 낼 수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가격 인상뿐이다. 이대로라면 내년 전기요금은 올해 인상분의 3배가 넘는 수준으로 오를 수밖에 없다. 매달 날아오는 전기요금 고지서를 보며 전 국민이 놀랄 일만 남았다는 의미다.
여기에 한전은 지난해 매출이 60조 원이 넘고, 협력업체는 2000곳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에너지 공기업이다. 정부가 “한전의 재무 위기가 경제 전반의 위기로 확산될 수 있다”며 전전긍긍하는 이유다.
이렇듯 민생·거시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을 부를 수도 있는 법안의 표결에 57명의 국민의힘 의원이 불참했다. 여당 관계자는 “여야 합의로 상정된 만큼 의원들이 당연히 본회의 통과도 무난할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각 상임위에서 한전법 개정안 처리에 찬성했던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도 정작 표결에서 무더기로 반대(51명)와 기권(46명)을 택했다. 민주당 관계자는 “법안 내용을 숙지하지 못한 의원들도 있었고, 반대 토론도 나오고 하니 찬성 누르기를 주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무책임하고, 무지했다는 이야기다.
국회의원 본연의 업무인 입법 활동조차 제대로 안 한 의원들 덕분에 에너지 가격 급등, 고물가, 금리 인상으로 허리가 휘는 서민 경제에 또 하나의 돌덩이가 얹어질 가능성이 커졌다. 입만 열면 “민생 경제”를 내세우는 여야의 본모습이다.
민생 경제가 휘청거릴 상황을 만들어놓고도 여야는 반성하는 기색조차 없다. 오히려 “목표는 오직 민생 회복”(국민의힘 정진석 비상대책위원장), “민생에 여야가 따로 있을 수 없다”(민주당 이재명 대표)며 민생 타령을 이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말로만 민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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