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하므로 꽃이 아름다우며 열매도 많다./샘이 깊은 물은 가뭄에도 마르지 아니하므로 내를 이루어 바다로 흐른다.” ‘용비어천가’의 한 대목을 현대어로 바꾼 것이다. 한자어가 단 하나도 없다. “천년의 시간을 겪으며 한자 한문에 가려졌던 이 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샘물과 같이 넘쳐 솟아나는 이 땅의 말”이라는 찬사는 과장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 학자 노마 히데키의 찬사다. 그는 ‘한글의 탄생’이라는 책에서 한글이 만들어진 것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문자의 기적이라고 일본 독자들에게 설명한다. 화가를 겸해서인지 그의 글은 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 보인다. 외국인의 찬사가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그는 신동집 시인의 시 ‘목숨’을 인용하며 한글이 있었기에 이런 시가 가능해졌다고 말한다. “우리는 아직도 포연의 추억 속에서/없어진 이름들을 부르고 있다/따뜻이 체온에 젖어든 이름들/살은 자는 죽은 자를 증언하라/죽은 자는 살은 자를 고발하라.” 시인은 6·25를 소재로 한 시를 통해 전쟁의 비극적 현실을 처연하게 증언한다. 그런데 한글이 없었더라도 그게 가능했을까. 아니다. 노마 교수의 말처럼 자기 문자가 없는 나라들의 경우처럼 로마자를 빌려 그 전쟁의 비극을 증언해야 했을지 모른다. 그가 말하는 “문자라는 기적”, 즉 한글의 가치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치를 너무 소홀히 하고 생각 없이, 정말이지 아무 생각 없이 모국어의 몸에 상처를 낸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입에서는 영어가 술술 나오고, 영어를 섞어야 우리 귀에는 멋지게 들린다. 일본 학자는 조선의 서사시 용비어천가를 읽으며 뿌리 깊은 나무와 샘이 깊은 물의 비유에 감탄하며 “한국어의 청초하고도 힘이 넘치는 선율”을 얘기하는데, 정작 우리는 아름다움을 보존하기는커녕 훼손하는 일에 공모한다. 외국인의 찬사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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