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일본 오이타현 고코노에(九重)정. 한국에서 온천 관광지로 유명한 벳푸에서 차로 1시간 10분가량 달려 해발 1100m의 깊은 산속에 도착했다. 서울 여의도의 3분의 2 규모의 부지(195만 m²)에 들어선 이곳은 일본 최대 지열(地熱) 발전소인 핫초바루(八丁原) 발전소다. 지진, 화산 분화 등이 잦은 지형적 특성을 살려 건설한 이 발전소는 하루 11만 kW(킬로와트)의 전력을 생산한다.
지열 발전은 탄소 배출이 제로(0)에 가까운 신재생 에너지이지만 운영사 측은 “이런 방식의 에너지를 안정적이면서 대규모로 공급하기는 어렵다”며 현실적 한계를 숨기지 않았다. 일본은 탄소 중립을 실현하기 위해 다양한 친환경 에너지를 개발하면서도 원자력발전을 탄소 배출이 미미한 ‘비(非)화석 에너지’로 분류하며 비중을 늘려 가고 있다.》
지열로 3만7000가구 전력 생산
산속 깊은 곳에 위치한 핫초바루 발전소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발전소 관계자는 “실제 열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수증기는 열을 식히는 냉각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핫초바루 발전소에서 생산되는 전력은 일반 가정 3만7000채가 사용할 수 있는 규모다.
이곳은 1977년 1호기, 1990년에 2호기가 완성됐다. 일본에서 5번째 지열 발전소로 상업운전을 시작했다. 마그마와 가까운 지하 최대 3000m 깊이의 지열 저류층에서 끌어올린 300도의 열로 물을 끓인 뒤 여기에서 발생하는 증기로 전력을 생산한다.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30km가량 떨어진 아소산은 지금도 분화 활동이 활발한 활화산이다. 기자가 방문한 날에도 멀리 보이는 분화구에서 한눈에 보일 정도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지난해 10월에는 화산재가 상공 3.5km까지 치솟을 정도의 대규모 분화가 있었다. 발전소가 위치한 오이타현은 일본 최대 온천지역이고, 발전소와 인접한 구마모토현은 ‘불의 고장’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화산 활동이 활발하다.
핫초바루 발전소를 관리 운영하는 규슈전력의 오노다 히로후미 부장은 “지열 발전은 순수 국산 자연 에너지로 전력을 생산하면서 이산화탄소도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며 “이 발전소에서 생산하는 만큼의 전력을 석유로 만들려면 연간 2억 L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지열 발전은 넓은 부지에 패널을 설치해야 하는 태양광이나 수십 m에 달하는 거대한 프로펠러가 필요한 풍력 등과 비교해 대규모 시설이 필요하지 않다. 다만 활화산이 없는 한국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일본 정부에 따르면 일본은 2347만 kW의 전력을 생산할 수 있는 지열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인도네시아에 이어 세계 3위다. 하지만 실제로 지열을 통해 생산하는 전력은 61만 kW로 보유량의 2.6%만 활용되고 있다. 일본은 지난해 4월 제시한 ‘2030년까지 탄소 46% 감축’ ‘2050년까지 탄소 중립 실현’ 목표에 따라 지열 발전을 통한 전력 생산량을 2030년까지 지금보다 2.5배 많은 148만 kW로 늘릴 계획이다.
지열 발전이 아직 저조한 이유는 넘어야 할 벽이 높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발전소가 직면한 지역 주민과의 갈등에서 지열도 예외가 아니다. 규슈전력 관계자는 “지열 특성상 인근에 온천이 많은데 온천수 용출량 감소나 환경오염을 우려하는 온천시설 소유주 및 종사자,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크다. 주민 설득에 길면 10년 이상 걸린다”고 했다.
지열을 뽑아낼 수 있는 곳의 80%가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것도 활용을 어렵게 한다. 핫초바루 발전소 인근에도 아소구주 국립공원이 있다. 친환경 에너지 생산을 위해 공원을 훼손해야 하는 딜레마는 태양광, 풍력뿐 아니라 지열도 마찬가지다.
원전 비중 확대 두고 여론 팽팽
지열 발전에 유리한 일본에서도 전체 전력 생산에서 지열이 차지하는 비중은 0.3%에 불과하다. 일본 전체 지열 발전의 70%가 규슈에 몰려 있지만 이 지역만 따져도 지열의 비중은 1.2%에 그친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본도 발전소의 탄소 배출을 줄이는 게 탄소 중립을 위한 최대 과제다. 일본에서 배출되는 탄소의 40%는 발전소에서 나온다. 다른 탄소 발생 요인인 공장(25%), 자동차 등 운송기관(18%)보다 비중이 높다. 일본은 전체 전력 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이 6.2%에 불과하고 화력발전 의존도가 높아 발전소에서 많은 탄소가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탄소 중립 실현을 위해 일본 정부가 실질적으로 주목하는 것은 원전이다. 일본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에 따른 후쿠시마 제1원전 폭발 사고로 모든 원전의 가동이 중단된 뒤 순차적으로 재개하고 있다. 일본의 총 33기 원전 중 현재 재가동에 들어간 원전은 10기에 불과하지만 내년 여름까지 가동 원전을 최대 17기로 늘릴 방침이다.
원전 가동에 따른 영향은 핫초바루 지열 발전소가 위치한 규슈 지역에서 특히 크다. 재가동하는 일본 원전 10기 중 4기(센다이 및 겐카이 각 2기)가 규슈에 있다. 규슈 지역 전력 생산에서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26.6%로 일본의 전국 평균보다 4배 이상으로 높다.
규슈전력 측은 원전의 의미에 대해 “석탄, 석유, 천연가스 등과 차별화된 비화석 에너지 비중이 높다”고 설명했다. 규슈전력은 센다이원전 2기의 가동도 연장할 방침이다. 태양광, 풍력 등이 증가 추세이지만 날씨에 따라 전력 생산이 들쭉날쭉하기 때문에 대규모 에너지저장시스템(ESS)을 개발할 때까지는 원전을 쓰겠다는 것이다. 신재생 에너지 투자를 위한 여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기존 원전의 수명 연장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일본 정부는 원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원전 가동 기한인 60년을 유지하면서 규제 기관 심사 및 법원 가처분 명령 등에 따라 가동하지 못하는 기간은 해당 기한(60년)에 포함하지 않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차세대 혁신 원자로 개발 건설 등 정치적 판단을 필요로 하는 항목이 제시되는 만큼, 연말까지 결론을 낼 수 있도록 검토해 달라”고 내각에 지시했다. 일본 정부는 22일 ‘그린 트랜스포메이션(GX) 실행 회의’를 열어 원전 활용 방침을 공식 결정하며 후쿠시마 사고 이후 11년 만에 국가 차원의 에너지 정책을 전환할 계획이다.
문제는 원전 안전성에 대한 국민적 우려다. 체르노빌 사고 이후 세계 최악의 원전 사고를 경험한 일본은 여전히 원전에 대한 불안감이 크다. 13일 발표된 NHK 여론조사에서 일본 정부가 추진하는 원전 운전기간 연장 방침에 대한 질문에 찬성이 45%, 반대가 37%였다. 찬성이 많긴 하지만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원자력시민위원회 좌장을 맡으며 일본 경제산업성 심의회에 참여하는 오시마 겐이치 류코쿠대 교수는 “정부가 원전 사고 피해의 교훈을 망각하면서 정책을 거꾸로 되돌리려 한다. 총리에게는 (원전 회귀가) 엄청난 일이라는 자각이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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