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전부라고 믿는 사람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철학자들에도 두 부류가 있다. 한쪽은 물질적인 것들을 참으로 있는 것으로 내세우는 데 반해, 다른 쪽은 비물질적인 것이 진짜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물질적인 것들은 모두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겨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 그런 주장의 이유이다. 피타고라스는 두 번째 부류의 철학을 대표한다.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數)들에서 만물의 원리와 본성을 찾았기 때문이다.》
윤회 믿어 육식도 삼간 수학자
피타고라스의 고향은 에게해 동쪽 섬 사모스였다. 서양 철학의 탄생지 밀레토스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하지만 마흔 살쯤 그는 정치적 박해를 피해 남부 이탈리아로 이주했다. 이곳은 피타고라스에게 새로운 생각을 펼칠 수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이었다.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그렇게 모인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지역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피타고라스와 그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부분 베일에 가려져 있다. 공동체 내부의 일을 밖으로 발설하는 것을 금지했던 계율 탓이다. 어쨌든 피타고라스 공동체 안에서 수학에 대한 연구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분명하다. 잘 알려진 ‘피타고라스 정리’가 그 증거이다.
그렇지만 수학이 피타고라스가 가졌던 관심사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옳지 않다. 피타고라스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수학보다 더 중요한 관심사는 종교적인 것, 즉 영혼의 문제였다. 피타고라스는 영혼이 죽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에게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육체로부터 영혼의 분리였다. 죽음을 통해 육체를 떠난 영혼은 언젠가 다시 몸으로 들어와 환생한다. 이것이 유명한 피타고라스의 윤회설이다. 윤회 과정은 반복되고 이때 사람의 영혼이 동물의 몸에 들어갈 수도 있다. 피타고라스 공동체는 육식을 삼갔는데, 그들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윤회의 사슬에 얽혀 친족 관계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수학에 대한 관심이 영혼의 윤회에 대한 믿음과 정말 공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에게는 피타고라스의 신념들이 상충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수학적 질서는 ‘합리적’이고 영혼에 대한 믿음은 ‘비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21세기의 과학 시대가 내세우는 ‘비합리성’과 ‘합리성’의 이분법은 ‘현대의 비합리적인 신화’일 뿐이다. 비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신화나 종교에도 합리적인 핵심이 있고 모든 것을 수들의 관계로 바꾸어 처리하려는 ‘합리적’ 계산의 논리에도 광기가 숨어 있으니까.
음악에서 우주 질서를 보다
피타고라스 공동체 안에서 영혼에 대한 관심이 어떻게 수학 연구로 이어졌는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음악의 역할과 본성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영혼의 조화와 평온을 추구한 피타고라스는 그 수단으로 음악을 매우 중시했다. 그래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은 잠자리에 들기 전 평화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마음의 평온을 되찾고 아침에는 활기찬 음악을 들으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현대인이 라디오 프로그램 ‘새아침의 클래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당신의 밤과 음악’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과 비슷하다.
음악을 중시했던 피타고라스는 어느 날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된다. 늘 그렇듯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에 대해 궁리하면서 그가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다. 그날따라 대장간의 망치 소리가 귀를 사로잡았다. 망치 소리가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일이….’ 대장간으로 뛰어든 피타고라스는 무게가 다른 망치들이 동시에 소리를 내는 데 그 비밀이 숨어 있음을 발견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조화로운 소리에 숨겨진 질서를 찾기 위해 실험을 했다. 한 줄짜리 일현금(一絃琴)을 튕겨 보면서 줄의 길이에 따라 소리의 높낮이가 달라짐을 확인했다. 현의 길이가 1:2, 2:3, 3:4의 비율로 바뀜에 따라 화음도 달라졌던 것이다!
음악은 소리의 현상이다. 하지만 소리가 난다고 해서 곧바로 음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소리가 음악이 되려면 소리의 질서가 필요하다. 음정을 만드는 수의 비례 관계가 바로 그런 질서이다. 예를 들어 서양 음악의 바탕을 이루는 8도 음정, 5도 음정, 4도 음정은 각각 1:2, 2:3, 3:4의 비율을 따른다. 피타고라스에게 이 발견은 우주적 조화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놀라운 체험이었다. 그는 무릎을 쳤다. 소리의 수적인 비율이 음악의 조화로운 음정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우주의 조화로운 질서 배후에도 물질들의 수적인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음정의 비례 관계에서 온 세상의 수적 질서를 끌어내는 것은 물론 ‘비약’이다. 하지만 이 상상의 비약이 없었다면 피타고라스의 정신은 보이는 물질의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수의 세계로 날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영원한 현재의 철학자’
세상의 모든 것이 수들의 관계로서 이해될 수 있다는 피타고라스의 생각만큼 서양 정신사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것도 없다. 마치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다른 몸으로 환생하며 윤회를 거듭하는 불멸의 영혼처럼, 피타고라스의 정신은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다른 형태로 부활해 서양 문명을 이끌어왔다. 그 정신은 피타고라스 사후 100년 뒤 그리스에서 플라톤의 철학으로 되살아났고, 2000년 뒤 유럽 대륙에서는 하늘과 땅의 비밀을 수학을 통해 찾아내려는 근대 자연과학으로 환생했다. “자연의 책이 수학의 언어로 쓰여 있다”는 갈릴레이의 말은 피타고라스 철학의 부활을 알리는 선언이었다.
피타고라스의 정신은 뜻밖의 분야에서도 되살아난다. 인간 두뇌의 능력과 정보를 스캔해서 컴퓨터에 업로드할 수 있다는 일부 과학자들의 상상 역시 피타고라스 윤회설의 재현이다. 둘 다 인간의 정신 능력이 몸과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다는 전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분리주의적 상상과 ‘뇌 신비주의’에 맞서 몸의 중요성을 강조한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의 과학자 앨런 야사노프가 ‘생물학적인 마음(The Biological Mind)’에서 영혼의 신화들을 소개하면서 윤회설을 언급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지만, 특히 피타고라스의 생각들은 ‘영원한 현재의 철학’이다.
피타고라스는 “수학의 요소들에 집중하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영혼이 정화된다”고 가르쳤다. 그런 그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어진다. 왜 이 나라에서는 수학 교육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감의 원천일까요? 대한민국의 수많은 ‘수포자’ 청소년들이 마음의 평온과 영혼의 정화를 얻게 하려면 수학 교육이 어떻게 바뀌어야 할까요? 피타고라스를 따랐던 플라톤은 분명한 지침을 제시했다. ‘계산이나 기하학이나 강제하지 말고 놀이 삼아 하게 하라. 억지로 배운 것은 영혼 안에 머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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