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는 늘 두 가지 문제가 있다. 급한 것과 중요한 것. 그런데 급한 것은 중요하지 않고, 중요한 것은 급하지 않다.” 이 말은 행동과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긴급성과 중요성의 딜레마’라는 화두를 던졌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 사람들은 무엇을 우선할까. 대부분 급한 쪽을 택한다는 것이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급한 일보다 중요한 일의 가치가 훨씬 클 때도 그렇다.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경영학 전문가들이 만들어낸 사고(思考) 도구가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다. 이 매트릭스는 할 일의 모든 목록을 4개 그룹으로 나눈다. ‘급하고 중요한 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 ‘급하지만 중요하지 않은 일’, ‘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 그것이다. 이 중 뒤의 2개는 부하에게 위임하거나(Delegate) 업무 목록에서 지워버리라(Delete)는 게 전문가들의 처방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 핵심은 ‘급하고 중요한 일’과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 또는 황금비율 결정에 있다. 국가든 기업이든 리더가 전자보다 후자에 더 큰 관심을 쏟아야 그 조직은 성공할 수 있다. ‘급하고 중요한 일’은 크게 강조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아서 스스로 챙기지만,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은 한 조직 안에서 소명감과 책임감이 남다른 사람, 즉 리더가 아니면 아무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급하지 않지만 중요한 일’이 소홀히 다뤄지는 예를 찾는다면 저출산·고령화 대책이나 연금개혁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나라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들이지만 지금 일을 하거나 안 하는 효과가 10년 뒤, 20년 뒤 나타나기 때문에 어느 정권도 명운을 걸고 덤비지 않는다. 대형 재난을 예방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마찬가지다. 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세계 최저의 출산율이고, 국민연금 폭탄 돌리기이며, 이태원 압사 참사다.
지난 7개월간 윤석열 정부의 국정 운영을 놓고는 이것저것 많이 벌이는 것 같긴 한데 뭘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굵직한 국정 어젠다도 보이지 않는다는 평가가 많다. 급한 일과 중요한 일의 경계와 균형이 무너진 탓일 것이다. ‘선택과 집중’이 없다. 15일 TV로 점검회의 모습이 생중계된 120대 국정과제도 비근한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유연하고 효율적인 정부 체계 구축, 공정한 경쟁을 통한 시장경제 활성화, 범죄로부터 안전한 사회 구현, 풍요로운 어촌 활기찬 해양… 등등. 이렇게 계속 이어지는 것이 120대 국정과제 리스트다. 손에 잡히는 구체성도, 이 정부만의 정체성도 보이지 않는다. 굳이 대통령실에 현황판을 걸어놓지 않더라도 각 부처가 알아서 챙겨야 할 기본 책무들이다.
대통령에게 가장 소중한 자원은 ‘시간’이다. 대통령은 거의 무한정에 가까운 인적, 물적 자원을 쓸 수 있으나 시간만은 예외다. 위임할 것은 위임하고, 지울 것은 지워버려야 중요한 어젠다에 쓸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대책 같은 것이 국가의 미래가 걸린 그런 어젠다다. 이런 일들은 대통령이 아니면 누구도 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윤 대통령이 15일 3대 개혁에 대해 강한 실천의지를 밝힌 것은 기대되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여전히 어떤 부분은 ‘수사(修辭)를 위한 수사’로만 읽힌다는 점이다. 연금개혁이 대표적이다. 윤 대통령은 연금개혁에 대해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는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는 안(案)만 만들고 실행은 다음 정부에 넘기겠다는 취지로 읽힌다. 그러나 연금개혁은 안이나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다.
3대 개혁과 저출산·고령화 해결의 확실한 단초만 마련해도 윤 대통령은 성공한 대통령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다. 이런 일들이 ‘대통령의 시간’을 집중 투자해야 할 일들이다. ‘긴급하고 중요한 일’들은 끊임없이 밀려오기 때문에 적당히 덜어내지 않으면 ‘번 아웃(탈진)’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시간관리 전문가인 스티븐 코비의 이야기다. 탈진 상태가 가까워지면 ‘중요하지 않은 일’에서 도피처를 찾고, 결국은 실패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시행착오를 피하려면 윤 대통령의 ‘아이젠하워 매트릭스’를 국가의 운명이 걸린 중장기 과제를 우선순위에 두고 다시 한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더 많이 위임하고 더 많이 지워야 한다. 무엇보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된, 보기에도 숨 막히는 ‘120대 국정과제 현황판’은 ‘책임총리’의 집무실로 보내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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