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우리나라 중산층은 전체 인구의 44%다(경제협력개발기구 기준). 30년 전만 해도 70%가 넘었던 중산층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평생 계층 연구에 천착해 온 구해근 하와이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중산층은 몰락한 것이 아니라 분화했다. 상위 10%에 해당하는 특권중산층이 새로 등장했다”고 했다. ‘20 vs 80의 사회’ 저자 리처드 리브스가 상위 20%를 상류중산층으로, ‘부당 세습’의 저자 매슈 스튜어트가 상위 10%를 신흥귀족으로 정의한 것처럼 한국에서도 특권중산층이 등장해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분석이다.》
―한국의 특권중산층은 어떻게 형성됐나.
“부유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가 특권중산층의 대다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의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기술·자본 집약적 산업으로 이행했고 대기업은 고급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파격적인 대우를 해줬다. 그 이후 대기업·정규직 위주 1차 노동시장과 중소기업·비정규직 위주 2차 노동시장에 줄이 그어졌다. 신분제와 다름없다. 부동산 버블도 특권중산층의 형성 요인이다. 자산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글로벌 시장에 한국 경제가 깊이 편입된 것도 특권적인 기회를 부여했다. 엘리트는 해외 유학부터 명품 소비, 웰빙 상품 등에 접근성이 높았다. 일반 중산층과 구분 짓기를 할 기회가 됐다.” ―최근 불평등 연구는 일관되게 부유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를 불평등을 고착시키는 주범으로 보고 있다.
“중산층의 분화는 서구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소득 상위와 하위 계층의 격차가 크게 벌어졌다. 한국은 공격적인 세계화를 추진한 나라다. 과거에도 상위 10%는 존재했다. 부동산으로 부자가 됐으나 교육 수준은 다소 떨어졌다. 현재 상위 10%는 명문대를 나와 유학을 한 전문직·관리직 엘리트로 구성된다. 이들은 경제 자본 외에 사회·문화 자본도 독점하고 있다. 능력주의를 앞세워 특권을 공고화한다.”
―계층 이동이 어려워지면 발생하는 문제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중산층은 국가와 사회 계약을 맺어 왔다. 한국의 경우 중산층이 경제 발전에 협조하면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이런 암묵적인 계약이 성립되면 중산층은 사회 안정의 기반이 된다. 1980, 90년대는 사회 계약이 충실히 이행됐다. 그런데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계층 이동의 길이 막혀 버렸다.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를 향한 분노를 자극한다. 사회적 신뢰에도 금이 간다. 사회 안정 세력이던 중산층이 그 기능을 잃어버리고 포퓰리스트의 판에 동원되기 쉬워진다. 경제 양극화가 정치 양극화로 이어지는 원리다.”
―미국 유럽 등과 달리 한국의 중산층은 계급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유럽과 미국 등의 중산층은 근대화 과정에서 종교 도덕 문화 등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유럽은 혁명을 통해 자생적으로 중산층을 쟁취했고, 미국은 청교도 윤리에 기반을 두고 성장했다. 한국은 국가가 중산층을 키워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부동산 투기 등 자산 축적 과정도 도덕적이지 않다. 문화적, 도덕적 우월성이 없는 특권중산층은 과시적인 소비로 다른 계층과 차별을 시도하고 있다.” ―한국 특권중산층이 명품, 외모, 웰빙 등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이유인가.
“여기에는 수요와 공급,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특권중산층이 신분을 소비로 과시하려는 욕구는 수요 측면이다. 고급 소비시장의 성장은 공급 측면이다. 고급 소비시장은 가방과 구두 같은 ‘지위재’뿐만 아니라 얼굴, 건강, 몸매 같은 ‘비지위재’까지 팔고 있다. 후발국의 신생 부유층이 새 고객으로 발굴된 것이다. 특권중산층의 욕구와 글로벌 기업의 수요 창출이 맞물린 결과다.”
―특권중산층을 강남스타일 계급으로 정의했는데…. 거주지가 계층 정체성이 되는 현상은 한국만의 특수한 현상인가.
“처음에는 강남을 진지하게 보지 않았는데 연구를 할수록 강남의 역할이 중요했다. 계층별로 주거지역이 분리되는 현상은 어느 나라에서나 나타난다. 강남이 독특한 건 그 규모가 다르다. 강남 서초 송파 3구의 아파트에 150만 명이 모여 산다. 공간적으로 밀집되고 계층적으로 균질한, 이만큼 대규모의 특권중산층 지역은 없다. 규모로만 보면 특권중산층을 강남중산층으로 대체해도 될 정도다. 미국에도 도시마다 부촌이 있다. 하지만 인구가 적고, 고급 주택은 고립돼 숨어 있다.” ―강남이 경제적·문화적 준거집단이 되는 전국의 ‘강남화’도 우려했다.
“강남은 개발 초기부터 교육과 부동산이 결합한 특권적인 기회가 주어진 곳이다. 명문 고교 이전으로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다시 대치동 학원가가 들어서며 부동산 가격을 끌어올렸다. 이 과정에서 나와 비슷했던 이웃들이 벼락부자가 됐다. 그러니 승복이 어렵고 강남이 도달해야 할 준거집단이 된다. 강남을 준거집단으로 삼으면 체감 중산층은 뚝 떨어질 수밖에 없다. 온 국민이 불행해진다.” ―어느 부모도 자식이 본인보다 못살길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한국 특권중산층의 불안감이 큰 것 같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일류대 관문을 통과해 대기업에 취직하는 단선적인 서열 정하기 게임을 하고 있다고 본다. 게임에서 첫 번째 규칙은 교육이다. 우리 사회 모든 자원이 교육적 성취에 따라 배분된다. 두 번째 규칙은 한번 지면 끝이다. 명문대 진학에 실패하면 좋은 일자리를 얻거나 자산을 축적할 기회도 놓치게 된다. 한국은 6·25전쟁을 겪으며 계급과 신분이 해체된 나라다. 평등의식과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할 수밖에 없다. 공정한 게임이 아니어도, 이길 가능성이 없어도 쉽게 포기할 수 없다.”
―기회 사재기(리처드 리브스)나 기회 세습(매슈 스튜어트)처럼 특권중산층이 교육 기회를 독점하는 건 세계적인 현상이다. 반면, 한국에선 모든 계층에서 사교육 열풍이 분다.
“굉장히 특별한 현상이다. 유교 문화권의 교육열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역시 수요와 공급을 같이 봐야 한다. 고교평준화가 의도와 달리 사교육을 자극했다. 부와 지위를 물려주려는 계층이 공교육에 만족하지 못해 사교육 시장을 창출했다. 공급도 충분했다. 운동권 출신 학원 강사처럼 취업이 어려웠던 유능한 인재들이 유입돼 우수한 사교육 시스템을 발달시켰다. 미국 내 한국 아이들도 방학이면 학원에 다니러 나오더라. 사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경쟁에서 탈락하기 쉽다.”
―이 책은 한국인은 왜 불행한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한국은 다양한 기준의 성공이 존재하지 않는 일직선 사회다. 지위가 높아도, 가진 게 많아도 행복하지 않다. 정경심 씨는 교수인데도 ‘내 목표는 강남에 빌딩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가질 만큼 갖고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더라. 사회 지도층이라는 장관 후보자도 다를 바 없다. 자칫 추락할까 가진 것을 움켜쥐고 불안에 떤다. 특권중산층의 성찰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희생시키는 구조인데, 모른다. 모든 기회를 독식하며 과도한 경쟁을 부추겨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
그는 “한국에 살았다면 사교육을 시키고 부동산 투자를 했을 수 있다”고 조심스러워하면서도 “한국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특권중산층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 국민이 문화와 스포츠에서 펼치는 역량을 보라. 보통 재주가 아니다. 이런 힘을 과도한 경쟁으로 소모시키는 건 정치인이나 지식인 등 특권을 가진 사람들이 자성할 부분이다. 지식인들은 이 정권, 저 정권 오가며 특권을 즐기고 있지는 않나. 정치인은 사회 전체의 발전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특권중산층의 물질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사회를 불필요한 경쟁으로 몰아넣고, 결과적으로 자식들의 삶을 불안하게 만든다. 도덕·윤리의 파괴자가 되어선 안 되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는 성숙함을 보여야 한다. 준거집단이 되는 특권중산층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구해근 美하와이대 명예교수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웨스턴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1년부터 하와이대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계급·계층 연구에 집중해 왔다. 한국의 경제 발전 과정에서 등장한 노동계급을 분석한 그의 저서 ‘한국 노동계급의 형성’은 2003년 미국 사회학회의 ‘아시아 부문 최우수 저서’로 선정됐다. 최근 세계화 이후 한국 중산층의 변화를 다룬 ‘특권중산층’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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