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연금개혁을 이끈 발터 리스터 전 노동사회부 장관은 와인 1병을 21년째 따지 않고 간직하고 있다. 2002년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연금개혁을 밀어붙일 수 있을지를 두고 내기해 받은 와인이라고 한다. 리스터 장관을 필두로 독일 정부는 2001년 공적연금을 덜 주고, 정부 보조금이 결합된 사적연금을 도입하는 방향으로 개혁에 나섰다. 가입자에게 줄어든 연금 수령액을 매년 공지하는 법안도 이듬해 못 박았다. 현지에서 동아일보 취재진을 만난 리스터는 이 와인을 소개하며 “당시 개혁 반발을 떠안고 물러나야 했지만 후회는 없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연금개혁이 답”이라고 했다.
윤석열 대통령도 15일 생중계된 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개혁은 인기 없는 일이지만 회피하지 않고 반드시 해내겠다”며 연금·노동·교육 등 3대 개혁을 본격화할 뜻을 밝혔다. 156분 회의에서 1시간을 3대 개혁안에 대해 설명할 정도로 확고한 의지를 내비쳤다. 3대 개혁과제는 시급하고 중요한 국가적 현안이지만 역대 정권마다 폭탄 돌리기를 하듯 미뤄 왔다. 특히 국민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금 개혁은 역대 정부마다 야심 차게 추진하다가 용두사미로 끝났다. 그나마 땜질식 처방을 해오던 것도 문재인 정부에선 아예 사라졌다.
이러다 보니 월급에서 떼는 국민연금 보험료 비율은 24년째 9% 그대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보험료율(18.3%)의 절반에 불과하다. 소득대체율(생애 평균 소득 대비 연금 수령액 비율)도 2007년 7월 이후 줄곧 40%다. 이대로라면 2039년부터 국민연금은 적자가 나고 2055년이면 적립금이 바닥나 1990년생 이후로는 연금을 한 푼도 못 받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왔다. 저출산 고령화 속도를 보면 이보다 더 빨라질 수도 있다.
국민연금 개혁은 지금의 ‘낸 것보다 더 받는’ 구조에서 ‘더 내고 덜 받는’ 방식으로 바꾸는 답이 뻔한 문제다. 관건은 실행력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에 연금개혁 완성판이 나오도록 지금부터 시동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보건복지부 장관도 내년 3월 나올 국민연금 장기재정추계 결과를 토대로 10월 정부 개혁안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이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가 밝힌 추진 일정보다도 한참 늦다. 연금특위는 민간자문위원회에 의뢰해 복수 개혁안을 만든 뒤 내년 4월까지 단일안을 확정할 방침이다.
국민연금 개혁은 “이번 정부 말기나 다음 정부 초기”인 2027년까지 미룰 일이 아니다. 2018년 4차 국민연금 재정추계가 나온 이후 정부가 토론회와 공청회만 이미 수십 번 열었고,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연금개혁에 대한 국민 공감대도 커졌다. 독일 리스터 장관은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연금제도가 붕괴 위기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1998년 ‘낸 만큼 돌려받는’ 식으로 연금개혁에 성공한 스웨덴은 실무작업단을 꾸려 최종 개혁안을 도출하기까지 2년여밖에 걸리지 않았다. 우리에겐 내후년 총선까지가 골든타임이다. 총선·대선 등 선거가 닥치면 더 어려워지는 만큼 집권 초기에 정권의 명운을 걸고 속도전에 나서야 한다. 미래세대를 위해 더 이상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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