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수수 혐의 등으로 9일 재판에 넘겨진 정진상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실 정무조정실장의 공소장은 33쪽 분량이다. 이 가운데 10쪽가량이 사건 관계인들의 지위나 유착, 대장동 개발의 배경 설명에 할애됐다. 공소사실이 아닌 내용도 여러 번 언급됐다. 정 전 실장이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과 함께 2013년 9, 10월경 대장동 민간 사업자에게 받은 유흥주점 접대를 금액과 참석자, 지불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적은 것이 대표적이다.
▷검사가 피고인을 기소하면서 법원에 제출하는 공소장엔 공소사실과 관련이 없는 내용을 기재해선 안 된다. 유죄로 예단할 수 있는 표현도 사용할 수 없다. 유죄 심증 형성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증거물이나 서류를 첨부하는 것도 금지된다. 범죄 사실을 간략하게 적은 공소장 하나만 제출하는 것이 원칙이어서 ‘공소장 일본주의(一本主義)’라고 부른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법관이 증거 조사를 하기 전에는 예단을 최대한 배제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다.
▷이 원칙을 위반하면 판사가 무죄를 선고할 수 있지만 과거엔 사문화된 규정이었다. 그런데 대법원은 2009년 “범죄의 실체 파악에 장애가 된다면 공소기각을 해야 한다”는 판례를 처음 남겼다. 이후 공소장에 대한 공방이 자주 벌어지고 있는데, 정 전 실장의 공소장도 법정 다툼이 예상된다. 검찰은 대장동 개발의 사건 구조가 워낙 복잡해 공소장을 길게 쓰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설명한다. 변호인 측은 공소사실과 무관한 내용이라고 맞서고 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법관들이 피고인석에 서는 불행한 사건 이후 공소장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른 일반 재판으로도 확산됐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사법농단 사건으로 기소된 전현직 법관들은 “공소장을 읽다보면 유죄로 귀결된다”며 첫 재판부터 공소장을 문제 삼았다. 공판중심주의가 더 강조되고, 국민참여재판이 늘어나면서 공소장은 앞으로 더 중요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공소장의 흠결로 무죄가 선고된 사건은 손에 꼽을 정도로 여전히 드물다.
▷공정한 재판을 위한 공소장 작성의 원칙은 사실 수사의 공정성 보장으로 연장될 필요가 있다. 수사 도중 피의사실이 유출되면 결국 기소로 이어지고, 유죄 심증이 굳어지면서 재판에도 영향을 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흔히 “검사는 공소장으로만 말한다”고 한다. 이는 피의사실을 섣불리 누설하지 말고, 증거 원칙에 따라 수사를 한 뒤에 수사 결과를 간명한 공소장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적 논란이 큰 사건일수록 검찰은 이런 원칙을 어기지 말고,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할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