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절한 은유로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조앤 핼리팩스도 그러한 사람이다. 숭산 스님의 제자였고 세계적인 선사(禪師)이며 작가이자 뛰어난 의료인류학자, 그가 들고나온 긴쓰기(金継ぎ) 은유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긴쓰기는 깨진 도자기를 붙이는 일본식 기법을 일컫는다. 깨진 자리를 옻 접착제로 붙이고 이음매를 금가루로 메워 도자기를 복원하는 기술이다. 그것은 깨졌던 흔적을 감추지 않고 드러내어 도자기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한다.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데서 생성되는 아름다움.
핼리팩스는 긴쓰기를 인간의 삶에 대한 은유로 삼는다. 그에게 수선된 도자기는 “허약하고 불완전하지만 동시에 아름답고 강인한 인간의 마음”을 은유한다. 상처로 갈라지고 깨지고 부서진 인간의 마음도 어떻게든 도자기처럼 다시 붙이면 더 아름답고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그렇다고 이것이 모든 경우, 모든 상처에 적용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에 저당 잡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말일 테니까. 그리고 깨지더라도 적당히 깨져야 수선도 가능할 테니까. 다만 적절한 상황에서는 상처와 고통이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더 큰 능력을 개발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수선된 도자기가 그러하듯 옛날 그대로 돌아갈 수야 없겠지만 상처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상처가 있기에 예전의 자신과는 다른 아름다움과 가치를 지닌 인간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일본 여행을 자주 했던 핼리팩스는 수선된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도자기에서 상처의 치유에 대한 은유를 발견한다. 상처를 받는 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면, 깨진 도자기가 긴쓰기를 통해 온전해지듯 우리도 그 상처를 감추거나 거부하지 말고 일종의 긴쓰기로 삼아 우리의 마음을 ‘수선’하여 더 단단하고 귀한 존재가 되자는 것이다. 참 따뜻하고 지혜로운 사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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