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는 임금 자리에 오른 지 3년부터 치통으로 고생했다. 잇몸이 붓는 증세가 특히 심했다. 풍열(風熱)이 가득 찬 것이다. 치아와 잇몸은 치주 인대로 단단히 붙어 있다. 열이 생기면 틈이 벌어져 이물질이 끼면서 염증이 생기고 붓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그 기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치통 증세는 이미 10년이 넘은 것이어서 왼쪽 이가 다 상했다. 그런데 오른쪽 이도 아프다.”
재위 11년 치통이 재발하자 어의 권성징은 적절한 치료법을 찾기 위해 임금에게 정확한 증상을 묻는다. “어금니가 흔들리고 아프니, 따뜻한 물이 들어가도 불편할 수 있고 아니면 차가운 물을 먹을 때 아플 수도 있습니다. 각각 (치료법이) 다른데, 어느 쪽이신지요.” 결국 어의들과 제조(諸曹)들은 영조의 치아 흔들림이 악화되고 통증이 심해지자 임금의 치아를 뽑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는 마취약이나 소독약이 없어 치아를 집게 등으로 뽑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고 무서워했다. 임금인 영조도 마찬가지였다. 영조 또한 인위적으로 치아를 뽑는 데 반대하며 심지어는 어사 박문수가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 집게로 이빨을 빼다가 큰 병을 얻은 것을 사례로 들기도 했다. 그러자 탕평책으로 유명한 우의정 송인명이 “오이가 익으면 꼭지가 떨어지는 것처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어찌 힘으로 뽑을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논란은 일단락됐다.
조선시대의 치통 치료제는 다름 아닌 소금 가루였다. 조선의 한의사들은 소금이 물때가 가득한 물질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고 믿었다. 갓 잡은 생선에 소금을 뿌리면 썩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치아는 침이 가득한 입속에 있는 뼈이고 그 사이에 물때처럼 노폐물이 끼면 염증이 생기는데 소금이 이를 녹이고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대표적 잇몸병인 풍치도 사실 치아와 잇몸 사이에 낀 노폐물이 염증을 일으켜 생기는 질환인 점을 고려하면 조선시대 소금 치료법은 과학적 접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재위 18년 더욱 심해진 영조의 치통은 백하염과 세신(족두리의 뿌리)을 달인 물로도 효험이 없자, 천초(川椒)라는 약재로 만든 가글제인 천초수로 증상을 진정시킨다. 잇몸 염증으로 고생하던 조선 제25대 왕 철종도 천초수로 큰 효험을 봤다. 철종은 천초수로 치료를 한 후 “씹을 때 아프지도 않고 정상으로 회복되었다”며 기뻐했다.
산초와 천초를 비슷하게 생각하지만 치통 치료에는 천초만을 사용한다. 한의학적 근거는 이렇다. 불꽃처럼 매운 맛, 즉 불의 성질(火)은 차가운 금속(金)을 정화하는 작용이 있는데, 천초의 강렬한 화의 기운이 차갑게 굳어진 치아의 노폐물을 없애고 잇몸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 필자는 한의대 교수 재직 시절 천초의 효능에 관한 과학적 실험을 통해 천초 추출물이 구강 내 충치 원인균인 뮤탄스(S. Mutans)의 활성을 효과적으로 저해하고 항균 효능은 농도가 진해질수록 증가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아야 할 만큼 잇몸은 노년 건강에 중요하다. 과학이 발전해도 옛사람의 지혜는 현대인에게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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