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나무야, 나는 가야 한단다. 네가 나무들을 느끼듯이, 귀 기울여 듣고 있으면 우리를 느낄 수 있을 거다. 널 기다리고 있으마. 다음번에는 틀림없이 이번보다 더 나을 거야. 모든 일이 잘될 거다. 할머니가.”
―포리스트 카터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중
할머니는 소년에게 ‘작은 나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미국 소설가 포리스트 카터의 자전적 성장소설에서 소년 ‘작은 나무’는 인디언 체로키 부족의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여러 마리의 개들과 살면서 인간의 사랑에 대한 태도를 배워 나간다. 위의 문장들처럼 슬픔과 희망의 의미 역시도.
나의 유년 시절, 가난은 꺼지지 않는 손난로 같았다. 기억이 난다. 다락방에 아버지 몰래 데려왔던 나의 고양이 ‘묘묘’를. 나의 할머니를. 지금도 나는 내 곁에 다녀간 것들의 뒷모습은 그대로 뒷모습으로 남아야 한다는 것이 이상하고 슬프다. 눈을 감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이 선명히 살아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나는 이 세계에서 작고 나약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펴낸 책에 ‘손끝으로 사랑이라고 쓰면 슬픔이라고 글썽거리는 것’이라고 사랑의 의미를 적었다. 눈을 감으면 어느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흑백영화의 한 장면 속에 나는 있다. 부엌에는 젊은 엄마가 밥을 짓고, 소파에서 조는 아버지. 할머니와 마실을 나가는 내 뒤로 쫓아오는 고양이 발자국. 창밖에는 함박눈이, 아직 열리지 않은 앵두나무 가지가 반짝이고, 고드름을 따서 손에 쥐고 있으면 우리 눈가가 젖는다.
나의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 살아 있고 여기 내가 살아 있는 한 슬픔은 소멸하지 않는다. 슬픔을 슬픔이라고 부르기 전에 자꾸 사랑인 것 같아서,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마음을, 새벽에 쓰는 편지를, 사랑은 우리를 결국 울게 하는 것들, 살아 있는 모든 의미들이라고 적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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