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은 마지막 물기 한 방울까지 짜낸 메마른 문장”이라고 판사들은 말한다. 부사나 형용사의 사용을 최대한 제한하고 주어, 목적어, 서술어 위주로 명확하게 써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기망하다(속이다)’, ‘불상(알 수 없는)’ 등 법률용어까지 곳곳에 들어간다. 그래서 잘 읽히지 않고 이해하기도 어렵다.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있는 장애인들에겐 판결문의 벽이 더욱 높다.
▷보통 행정·민사재판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할 때 판사는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최근 서울행정법원 행정11부가 한 선고는 달랐다. 원고가 청각장애인인 소송에서 선고를 하면서 “안타깝지만 원고가 졌습니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판결문에도 그대로 적혔다. 평상시 잘 쓰이지 않는 ‘기각’이라는 단어를 수어로 통역하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사정을 고려해 원고가 판결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재판부가 배려한 것이다.
▷‘쉬운 말로 요약한 판결문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별도의 챕터가 포함된 것도 이 판결문의 특징이다. “원고와 다른 지원자들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모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다고 판단했습니다”라는 식으로 쉽게 존댓말로 설명했다. 이 재판의 쟁점은 원고가 취업 면접에서 수어 통역으로 의사소통을 하느라 시간에 손해를 봤는지 여부였는데, 그렇지 않다는 내용이다.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삽화까지 첨부했다. 이처럼 구어체 문장과 그림 등을 이용해 장애인의 이해를 돕는 ‘Easy Read’ 방식의 판결문이 나온 것은 처음이다.
▷난해한 판결문은 장애인들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법원 예규는 “판결문은 되도록 쉬운 단어를 사용하고 문장은 짧게 작성하라”고 권고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가사(가령)’, ‘불비(못 갖춤)’, ‘경료됐다(마쳤다)’ 같은 낯선 표현이 판결문에서 툭툭 튀어 나온다. A4 용지 한 장이 넘는 긴 문장이 등장하기도 해 ‘판결문 읽다 숨넘어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이렇다 보니 법조인이 아닌 사람들은 판결문을 읽다가 누가 뭘 했다는 것인지, 왜 이런 결론이 나온 것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판결문에는 단 한 글자의 실수도, 오독(誤讀)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계어 판결문’을 계속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판결문은 독백이 아니라 대화”(박형남 ‘법정에서 못다 한 이야기’)라고 했다. 재판의 당사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돼야 한다는 취지다. 엄밀하면서도 쉬운 판결문을 쓰는 것은 정성과 노력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다. 그렇더라도 ‘국민에게 다가가는 사법부’가 되기 위해선 반드시 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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