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퇴임하는 미국 공화당 소속 래리 호건 메릴랜드 주지사는 국내에 ‘한국 사위’로 친숙한 인물이다. 부인이 한국계 미국인 유미 호건 여사인 그는 공식석상에서 자주 “메릴랜드주는 주지사 관저에 유일하게 김치냉장고가 있는 곳”이라며 한국과의 인연을 강조한다. 유미 여사는 “남편이 좋아하는 돼지불고기를 만들면 ‘낫 핫 이너프(not hot enough·덜 맵다)’라면서 고춧가루를 더 넣어 달라고 한다”며 그의 한식 사랑을 자랑하곤 했다.
최근 미 워싱턴포스트(WP)는 사설에서 “공화당이 그(호건 주지사)를 대선 후보로 고려하지 않는다면 손해가 될 것”이라고 했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같은 ‘반(反)트럼프’ 후보들에게 가려 공화당 대선 후보 여론조사에 이름도 못 올리는 그를 유력 일간지가 지지한 것은 이례적이다.
WP는 그 이유로 진영을 넘나드는 친밀한 소통 능력과 함께 그의 정치적 근성을 꼽았다. WP는 “호건은 도널드 트럼프(전 대통령)에 대한 반대로 일찌감치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다”며 “다른 많은 공화당 고위직과 달리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016년 대선을 휩쓴 광풍에 많은 공화당 유력 인사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섰지만 호건 주지사는 끝까지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거부했다. 자신의 정치적 기반인 메릴랜드 공화당 지지층 절대다수가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만큼 이후 그의 정치 행보는 평탄치 않았다.
트럼프 지지층에선 호건 주지사의 반트럼프 행보가 대선 출마 발판으로 삼기 위한 정략적 판단 아니었느냐는 비판이 거세다. 이 때문에 지난해 11월 중간선거에선 민주당과 ‘트럼프 공화당’ 협공 속에 자신이 후계자로 점찍은 후보가 경선에서 맥없이 물러나는 굴욕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호건 주지사는 10일 메릴랜드주 의회에서 한 퇴임 연설에서 “독극물 정치는 미국을 회복시킬 수 없다”며 중간선거 이후 다시 확산되고 있는 분열의 정치를 경계했다. 그는 “8년 전 주지사로 취임하며 상대를 비하하고 분열을 부추기는 정치를 경고했다”며 “우리는 정치와 사회에 퍼지는 분노와 혐오를 이겨내고, 서로에 대한 믿음의 연대와 존경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대로 미국은 전·현직 대통령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가 불거지며 다시 깊은 분열의 터널에 들어서고 있다. 2024년 대선 출마를 사실상 선언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받는 각종 혐의를 벗겨내기 위해 조 바이든 행정부를 대대적으로 조사하겠다고 나선 공화당은 동시에 바이든 대통령의 기밀문건 유출을 빌미로 탄핵 카드를 꺼내들 조짐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 문건 유출에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던 바이든 대통령은 정작 두 달 이상 감춰둔 문건 유출 문제가 잇달아 불거졌는데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야당 공화당과 바이든 행정부는 연방정부 부채 상한선 증액을 두고도 팽팽히 맞설 조짐이다. 공화당 강경파와 재선 도전을 앞두고 물러서지 않으려는 바이든 대통령이 벌이는, 세계 경제를 뒤흔들 미국 디폴트(채무 불이행)라는 파국을 내건 위험한 게임이다. 이런 상황에서 “복수(復讐)의 정치는 자유의 폐허로 이어질 것”이라며 “더 많은 정치 지도자들이 극단과 맞서야 한다”는 호건 주지사의 메시지는 울림이 크다.
그의 메시지는 야당 대표 사법 리스크로 마비된 한국 정치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강경파와 선동가가 주도하는 정치 극단화의 끝은 민주주의 종말이라는 경고가 미국에만 해당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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