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불법적으로 반출됐을 가능성이 높은 묘지석(墓誌石·고인의 행적을 기록해 묘에 묻는 돌이나 도자기판)이 우리 박물관에 있어요.”
지난해 12월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 이런 e메일이 왔다. 한국 컬렉션을 대거 소장하고 있는 해외 한 박물관의 학예연구사가 해외 소재 한국문화재의 존재를 알려온 것. 묘지석은 원래 고인과 함께 무덤에 묻혀 있어야 할 유물이다. 이 연구사는 “묘지석의 반출 경위를 함께 조사해 보고, 불법성이 드러날 경우 한국 반환을 논의해보자”고 제안했다.
비슷한 일은 지난해 2월에도 있었다. 미국 클리블랜드미술관이 조선 후기 무신 이기하(1646∼1718)의 묘지석 18점을 자진 반환한 것. 이 미술관은 해당 유물의 불법 반출 여부가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는데도 선뜻 반환을 결정했다. “후손들을 위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게 이유였다. “유교 문화가 뿌리 깊은 한국으로서는 조상의 묘지석이 해외에 반출돼 있는 것을 용인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문화재 전문가들은 “4, 5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 나치 시대 약탈 문화재 반환하는 독일
과거에는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외국 박물관에 연락해 “한국 컬렉션을 조사하고 싶다”고 밝혀도 날 선 반응만 하기 일쑤였다. 재단이 유물 반출의 불법성 여부를 조사해 반환을 요구할까 봐 꺼렸던 것이다. 소장한 한국 문화재를 일절 공개하지 않는 곳도 있었다. 1970년대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고 박병선 박사(1923∼2011)가 파리 국립도서관 별관 창고에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내 공개하자 “비밀을 발설했다”는 이유로 사직을 권고당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최근 변화의 흐름이 감지되고 있다. 차미애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실태조사부장은 “외국 박물관이나 연구기관이 자국에 있는 한국 문화재에 대한 연구 조사를 진행하자고 먼저 제안하고 있다”며 “문화재를 약탈했던 각국 소장처가 앞장서 반환을 검토하는 사례가 세계적으로도 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은 변화는 독일이 이끌고 있다. 나치 시대(1933∼1945년) 유대인 소장자로부터 약탈한 문화재에 대해 자성하며 반환에 나선 것. 2000년대 초부터 독일분실미술품재단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에게서 약탈한 문화재의 출처에 대한 연구를 벌이고 있다. 출처 연구는 해당 문화재가 만들어진 시점부터 현재까지 소유권 변화 내력과 수집 정보를 모두 추적하는 것을 일컫는다. 재단은 이 과정에서 드러난 약탈 여부 등 문화재의 불법 반출 정보까지 ‘분실미술품 데이터베이스’에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게르만국립박물관은 2014∼2018년 이 재단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이 나치 시대에 입수한 유물 1200여 점에 대한 연구를 벌였다. 유물 중 약 10%의 출처를 새로 밝혀낸 박물관은 약탈한 것으로 입증된 33점을 원소장자에게 돌려주기 위해 절차를 밟고 있다.
프랑스도 동참했다. 2021년 3월 프랑스 문화부는 파리 오르세미술관이 소장하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걸작 ‘나무 아래 핀 장미’(1905년)를 원소장자인 유대인 가문 후손에게 돌려줬다. 1938년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여성 노라 스티아스니가 이 그림을 나치에 강제로 헐값에 팔아야 했던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로즐린 바슐로나르캥 프랑스 문화장관은 반환 당시 “이번 결정은 정의에 대한 우리의 결의를 보여준다”고 했다.
● 식민지배 자성 속 출처 연구 확산
나치 약탈 문화재에 대한 반성은 제국주의 시절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에서 약탈한 문화재를 반환하는 움직임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베닌 청동’ 컬렉션을 둘러싼 유럽의 대응이 대표적이다. 이 컬렉션은 1897년 영국군이 현 나이지리아 일대에 있던 베닌왕국을 점령해 왕궁에서 약탈한 유물이다. 독일 로텐바움세계문화예술박물관은 영국, 프랑스 등 세계 각국 기관과 협업해 영국군에 약탈된 뒤 세계로 흩어진 베닌 청동 유물에 대한 연구를 벌였다. 독일은 2021년 4월 “식민지 과거를 재조명하고 해결해야 할 역사적·도덕적 책임이 있다”며 독일 내 베닌 청동 1130여 점의 소유권을 모두 나이지리아 정부에 넘겼다. 지난해 8월 영국 런던 호니먼박물관도 베닌 청동 컬렉션 72점의 소유권을 나이지리아 정부에 이양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도 베닌 청동 29점의 소유권을 모두 넘겼다.
교황청도 문화재 반환에 합류했다. 지난해 12월 교황청은 바티칸박물관이 소장한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조각품 3점을 그리스 정교회에 반환하기로 결정했다. 교황청은 “진리의 세계적인 길을 따르려는 교황의 진정한 열망의 구체적인 표시”라고 설명했다. 문화재 반환에 회의적이던 영국 역시 19세기 초 떼어가 런던 영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르테논 신전의 부속물 ‘엘긴 마블스’를 그리스에 반환하는 논의에 착수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세계 12개국 300여 개 기관이 약탈 문화재에 대한 출처 연구를 벌이고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무렵 불법 반출돼 경매 시장에 나온 유물을 대량 소장한 미국 박물관들이 최근 출처 연구에 적극 나서면서 약탈 문화재에 대한 윤리적 성찰은 더욱 확산하고 있다.
● “해외 소재 문화재 출처 연구 확대돼야”
문화재 반환은 국외 소재 문화재가 22만9655점(15일 기준)에 달하는 우리에게는 다행스러운 움직임이다. 한국은 조선 말 외세의 침입과 일제강점, 6·25전쟁을 겪으며 수많은 문화재가 해외로 반출됐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따르면 15일 현재 문화재 반출이 확인된 국가와 문화재 수는 일본 9만5622점, 미국 6만5241점, 독일 1만4286점, 영국 1만2804점이다. 이 밖에도 중국, 러시아, 이스라엘 등 모두 27개국에 달한다.
우리 정부도 세계 각국의 기관과 협업해 한국 문화재의 반출 경로를 분석하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올해부터 미국 다트머스대, 영국 런던대 동양아프리카학대학(SOAS)과 협업해 스미스소니언박물관과 보스턴미술관, 영국박물관 등이 소장한 한국 문화재의 출처 연구를 벌인다. 독일에 있는 한국 문화재에 대한 출처 연구도 준비하고 있다. 일본, 미국 다음으로 한국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독일은 박물관들이 협업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한다. 재단 관계자는 “향후 5년간 개항기와 대한제국 시기 국외로 넘어간 문화재를 대상으로 연구를 벌이고, 추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시기로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연구에는 꾸준한 지원이 필수적이다. 독일분실미술품재단은 유대인으로부터 약탈한 문화재의 출처 연구 지원에 2008년부터 연간 150억 원가량을 투입했다. 베닌 청동 컬렉션 반환 역시 소장 기관들과 나이지리아 정부 등으로 2010년 결성된 ‘베닌 대화 그룹’이 10년 넘게 연구와 논의를 한 끝에 최근에야 결실을 맺었다. 한국은 이제 시작 단계다. 한국 문화재를 소장한 외국 기관과 지속적으로 함께 연구하고 신뢰를 쌓을 필요가 있다. 수십 년을 내다보며 문화재 환수를 위한 장기전을 벌이려면 충분한 예산과 인력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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