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장비 강국인 네덜란드의 리셰 스레이네마허 통상장관이 “중국에 대한 미국의 반도체 생산기술 수출 제한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스레이네마허 장관은 16일 언론 인터뷰에서 “미국이 지난해 10월 새로운 규칙을 들고나오면서 운동장이 바뀌었다”며 “우리는 그 제안에 서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에 이대로는 동참하지 않겠다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밝힌 것이다.
네덜란드는 첨단 반도체의 미세 공정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생산업체 ASML이 있는 국가다. 네덜란드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아야 한다는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미 2019년부터 ASML 첨단 장비의 대중 수출을 중단해 왔다. 그러나 미국이 지난해 10월 대중 규제를 한층 강화하자 공개적으로 반발하고 나선 상황이다.
반도체는 안보와 직결되는 전략품목이자 첨단기술 개발을 견인하는 핵심 경제 산업이다. 제품과 장비, 부품 생산에서 전 세계가 복잡한 공급망 생태계로 얽혀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ASML의 경우만 해도 미국의 규제로 줄어드는 중국 매출은 5% 정도지만 그 경제적 여파는 한국과 일본, 대만, 독일 등 다른 반도체 생산국가로 번질 수밖에 없다. 나토(NATO)로 미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네덜란드조차 다른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이유다.
다른 동맹국들도 다르지 않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최근 워싱턴에서 진행한 미일 정상회담에서 반도체 규제에 대한 질문에 “확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삼가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적 기지 공격 능력’ 확보를 비롯한 새 방위전략에 대해 미국의 지지를 끌어내며 밀월을 과시하면서도 반도체 규제를 놓고는 선뜻 호응하지 않은 것이다.
미중 간 패권 경쟁 속 자국 우선주의까지 강해지는 고차방정식을 놓고 주요국들은 대응책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동맹국들과의 ‘반도체 연대’를 외치고 있는 미국조차 캐나다, 멕시코와의 3국 정상회담에서는 “아시아에 대항해야 한다”며 반도체 협력을 주문했다. 우리로서도 안보와 경제의 두 측면에서 국익을 극대화할 지점을 찾는 과정에는 보다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는 의미다. 미국 또한 일방적으로 정책을 밀어붙이기보다 동맹국들의 상황을 봐가며 융통성 있게 대중 규제를 조율, 적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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