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서 의대 합격생을 가장 많이 배출하는 학교는?” 답을 과학고나 자사고 같은 유명 고교에서 찾으려고 하면 이미 출발부터 틀렸다. 정답은 ‘서울대’라고 한다. 서울대생 가운데 재수나 반수(半修)를 해서 의대에 가는 학생들이 그만큼 많다는 뜻의 우스갯소리지만 최근 대학에 불고 있는 ‘의대 쏠림’ 현상을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종로학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에서 자퇴한 학생이 1874명으로 전년 대비 40% 늘었다. 이들 대학의 입학 정원이 대략 1만2000여 명이니까 6명 중 1명꼴로 어렵게 얻은 학생증을 자진 반납한 셈이다. 이들 자퇴생의 75%는 자연계열로 대부분 수능을 다시 쳐서 의약 계열에 지원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자퇴생이 많아지면서 학과 운영이 어려워졌다는 하소연도 나온다.
▷어떤 난관이 있어도 의대에 들어가겠다는 것은 과학·기술 인재를 키울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고, 영재고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과학고는 ‘의학 계열 대학에 진학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학생만 입학시킨다. 만약 서약을 어기고 의대에 진학하면 장학금·교육비 환수, 대입 추천서 제외 등의 불이익을 준다. 하지만 올해 입시에서 서울과학고는 3학년 정원의 32%인 41명, 경기과학고는 19%인 24명이 의대에 지원했다. 그동안 지원받은 교육비 500만∼600만 원을 토해 내는 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의대 선호 현상은 2000년대 중반 이후 시작됐지만 최근 강도가 더 세졌다. 의대에 목을 매는 이유는 의대 졸업 후 누릴 수 있는 직업적 안정성과 고소득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의사의 평균 연봉은 2억3070만 원이다. 대기업 평균 연봉 7000만 원의 3배를 웃돈다. 개원의는 더 높아 평균 3억 원에 육박한다. 청년 취업문은 점점 좁아지는데 의대에 입학만 하면 장밋빛 미래의 문을 열 수 있으니 실력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상위권 대학 학생들의 무더기 자퇴로 공백이 생기면 중위권 대학 학생들이 편입을 위해 재수나 반수를 하고, 다시 지방대 학생들을 자극하는 도미노 현상이 벌어진다. 이처럼 의대가 블랙홀처럼 우수한 인재들을 빨아들이는 것은 대학 교육과 인재 관리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큰 낭비다. 의대 쏠림은 결국 다른 선택지가 불확실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술과 아이디어로 창업 등에 도전할 만한 환경이 부족하고, 한 번 실패하면 다시 일어서기 힘들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의 가치와 적성을 펼치는 데 있어 의대만큼 매력적이고 보상 받을 수 있는 길이 많아야 의대 쏠림이 사라질 수 있다. 쉽지 않은 길을 가야 하겠지만 정부와 산업계, 교육계가 차근차근 숙제를 풀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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