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잣돈 3000만 원으로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어 100억 원대 자산가가 된 환경미화원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서울 구도심 빌라가 투자 발판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빌라왕’으로 소개하며 TV 방송에 출연하고 책도 여러 권 썼다. 청소차 대신 고급 캐딜락을 몰게 된 성공담에 많은 이들이 혹했다. 하지만 이 원조 빌라왕도 인터넷카페 회원들에게서 투자금을 받아 자기 빚을 갚은 게 들통나 4년 전 법정구속 신세가 됐다.
한때 빌라 자산가를 뜻했던 빌라왕이 요즘 전세 사기꾼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거북한 별칭이지만 빌라왕부터 건축왕, 빌라왕자, 빌라의 신까지 세입자를 등친 사기범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빌라왕 김모 씨가 1139채, 인천 건축왕이 2709채, 빌라의 신 권모 씨가 3493채를 보유했다니 사기 수법도 대담해졌다. 왕과 신으로 불리는 이들이 몸통인 경우도 있지만 조직 범죄단의 깃털인 사례가 적지 않다.
조직적 전세사기는 법망을 피해 교묘하게 이뤄진다. 대체로 건축주, 분양업체, 공인중개사, 명의를 빌려주는 빌라왕 등이 한 팀으로 움직인다. 이들은 시세 파악이 쉽지 않은 신축 빌라의 전세를 집값보다 비싸게 내놓는다. 중개사가 세입자를 구해 오면 명의를 빌라왕에게 넘겨 계약한다. 사기 일당은 자기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수백 채 빌라를 사들여 수익을 나눠 갖지만, 세입자는 만기가 돼서야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같은 수법으로 100억 원대 피해를 입힌 빌라왕이 현재 밝혀진 것만 5명이다.
피해자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것은 전세 확정일자를 받고 전세금 보증보험에 드는 등 각종 안전장치를 마련하고도 사기에 노출됐다는 점이다. 사기꾼들은 세입자가 전입신고를 한 다음 날부터 법정 대항력이 생긴다는 걸 노려 매매와 전세를 동시에 하는 수법을 썼다. 임차인 보호를 위해 마련된 주택도시보증공사(HUG) 보증보험은 공시가격의 150%까지 시세를 인정해 줬는데, 오히려 이 기준은 사기 일당이 전세금을 끌어올리는 한도로 악용됐다.
2021년 8월부터 모든 임대사업자의 보증보험 가입이 의무화됐지만 신고에 의존하는 데다 관리감독이 되지 않아 무용지물이었다. 임대사업자로 등록한 빌라왕 김 씨도 1139채 중 보증보험에 가입한 주택은 44채뿐이다. 집주인의 세금 체납 같은 불리한 정보도 세입자들은 알 길이 없다. 이런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정부와 국회가 뒤늦게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세입자들의 공포는 여전하다. 지난해 12월 서울의 빌라 전세계약은 1년 전보다 40% 급감했다.
전세사기 피해자 10명 중 7명이 2030세대다. 자금이 부족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빌라 전세를 첫 보금자리로 택하다 보니 쉽게 사기꾼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계약 전 꼼꼼히 확인해도 중개업자가 시세라고 하면 믿을 수밖에 없는 빌라 사기 생태계에서 전 재산을 날리는 청년들이 속출하고 있다. 고금리 한파에 전세사기 공포까지 더해져 청년층은 공공임대로 내몰리는 처지다. 서울에서 최근 마감된 청년공공임대 청약 경쟁률은 400 대 1을 웃돌며 역대 가장 높았다.
치솟는 대출이자 걱정도 모자라 제2, 제3의 빌라왕을 만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현실에서 청년들은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 악질적인 전세사기를 뿌리 뽑아야 하는 이유다. 전세사기나 전세제도의 맹점이 하루 이틀 된 문제가 아닌데도, 이제야 수습하는 뒷북 대응으로는 피해를 막을 수 없다. 전세사기로 피눈물 흘리는 청년과 서민들이 없도록 정부와 국회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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