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아 놓아도 간다던 ‘국방 시계’가 멈췄다. 지난해 12월 26일 북한 무인기 5대가 영공을 휘젓고 다닌 날부터다. 군 당국은 국회, 정부, 언론, 여론을 통해 전방위로 쏟아지는 지탄을 받아내며 대응하느라 꼬박 한 달을 보냈다. 해가 바뀌었지만 무인기에 발목 잡힌 군은 2022년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김승겸 합참의장은 27일 주요 지휘관 화상 회의를 주재하며 군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합참 작전본부는 지난해 12월 26일 이후 ‘올스톱’ 상태다.”
대북 작전 핵심 부서인 합참 작전본부가 무인기에 매몰돼 버린 건 군이 자청한 측면이 크다. 무인기 대응 작전에 실패했고 그 결과를 바꿀 수 없다면 군은 작전 실패 원인 등을 빠르게 파악한 뒤 이를 있는 그대로 밝혔어야 했다. 군 수뇌부가 대국민 사과라도 해 사안을 털어내고 북핵 미사일 등 더 시급하고 중대한 현안에 초점을 맞췄어야 한다. 무인기 대응 보완책은 이보다 더 빨리 발표해 국민 불안을 없애는 데 우선순위를 뒀어야 했다.
그러나 합참 전비태세검열실은 사건 발생 다음 달부터 초동 조치의 문제점 등을 조사하는 검열에 돌입하고도 그 결과를 한 달이 지난 이달 26일에야 발표했다. 검열실이 북한 도발 상황을 각급 부대에 실시간으로 전파해 대응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고속상황전파체계 등 우리 군의 정보 공유·전파 시스템이 사건 당일 작동하지 않은 사실을 밝혀내 합참의장에게 중간 보고한 건 13일로 알려졌다. 핵심 결과를 보고받고도 발표를 미루면서 무인기 국면의 연장을 자청한 것. 군이 이 결과를 즉시 언론을 통해 발표하고 어차피 맞을 매를 앞당겨 맞았더라면 ‘무인기 블랙홀’에서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와 현행 작전에 충실할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뒤늦은 검열 결과 발표마저도 군 공개 자료엔 정작 부실 대응의 주원인인 상황 공유·전파 체계의 문제점이 제대로 포함돼 있지 않았다. ‘적극적인 상황 공유 및 협조 미흡’ 등 구체성이 떨어지는 몇 단어로 넘어가려 한 흔적이 역력했다. 26일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들이나 기자들이 따져 묻지 않았더라면 애써 답하려 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깔끔하게 털어버리지 못하면 무인기 국면은 더 이어질 수밖에 없다.
국방부 장관을 지낸 한 예비역 대장은 “북한 무인기는 무장하고 폭격을 해봐야 살상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카메라로 핵심 시설을 촬영해도 구글 어스 사진 수준”이라며 “한낱 무인기 때문에 군이 오랜 기간 허우적대는 모습이 안타깝다”고 했다. 군 고위 관계자는 “합참의장이 국면 전환을 위해 검열 결과를 최대한 빨리 발표하겠다는 결심을 했어야 했다. 사안을 오래 끌면서 ‘무인기 피로감’이 군내에 너무 많이 누적됐다”고 했다.
미 의회조사국(CRS)은 최근 ‘북한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 보고서를 통해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 미사일에 핵 탑재가 가능하다고 평가했다. 이 보고서에는 빠졌지만 ‘북한판 에이태큼스(KN-24)’, ‘초대형 방사포(KN-25)’도 핵 탑재가 코앞까지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3종 세트’는 남한 전역을 사정권에 두는 단거리탄도미사일. 머리 위에 대량살상무기인 북핵을 이고 살아야 하는 시대가 왔다는 의미다.
북한 무인기는 심리적 불안을 야기할 뿐 실질적인 군사 위협은 되지 못한다. 이종섭 국방부 장관 역시 11일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무인기는) 군사적 수준에서 보면 크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봐왔다”고 했다. 무인기 정국 탓에 한 발에 수십만 명이 즉사할 수 있는 북핵 위협이 대응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듯한 현 상황을 가장 반길 이는 북한이다. 무인기 대응 초동 조치에서 실수를 범한 군 실무자들이나 지휘관들을 문책해 군이 술렁일 경우 이를 가장 환영할 이 역시 북한일 것이다.
지난 한 달간 군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쏟아지는 질타로 실무자들과 지휘관들은 공식 문책을 받지 않고도 엄중 문책을 받은 격이 됐다. 김승겸 합참의장은 27일 지휘관들을 질타하며 “회사로 치면 지휘관들은 최고경영자(CEO)다. 회사를 말아먹는 지휘관이 없길 바란다”고 했다. “내부 총질 하지 말라”고도 강조했다. 이들을 실제로 고강도로 문책하며 무인기 정국을 한 달을 넘겨 더 길게 끌어가는 것이야말로 내부 총질이자 군을 ‘말아먹는’ 자충수가 될 수 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군을 빨아들이다시피 한 무인기 블랙홀에서 벗어나 머리 위 진짜 위협이 무엇인지 바로 볼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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