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지방 도시에 방문할 일이 있었다. KTX역에서 내리자마자 역 앞에 산을 깎아 최소 500채 규모 아파트는 지을 수 있을 만큼 큰 공터를 조성해 놓은 것이 보였다. 바로 다음 블록부터는 대단지 아파트가 줄지어 올라가고 있었다. 중도금 대출 무이자 등 각종 분양 요건을 홍보하고 있는 플래카드도 눈에 띄었다. 검색해 보니 이 도시에만 이런 택지지구가 서너 곳은 있었다. 구도심 재생을 위해 초고층 주상복합 시설 건설을 추진한다는 기사도 눈에 띄었다. 동시에 미분양이 전국에서 손꼽히게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도시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의 지방 도시에서 그다지 특이할 것 없는 풍경이다. 도심에서 떨어진 외곽에 주요 인프라를 유치하고 인근에 택지를 조성한다. 이때 주요 인프라는 KTX역이기도 하고, 새 산업단지나 관광단지이기도 하다. 구도심의 오래된 아파트나 주택에 살던 지역 주민들은 신축을 찾아 외곽으로 이주한다. 구도심이 공동화되고 상권이 죽자 이젠 구도심을 살리겠다고 다시 재정을 투입한다. 인구는 늘지 않고, 재정만 낭비된다. 동아일보가 새해특집으로 보도한 ‘지역 소멸에서 지역 부활로’ 시리즈 1회에 나오는 ‘제로섬 게임’은 이렇게 지금도 지방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한국에서 인구 감소는 기정사실이자 예정된 미래이다. 아이를 낳을 인구 자체가 줄어든 현재로선 인구 감소 이후의 사회에 빨리 적응하는 것이 충격을 줄이는 첫 번째 길이다. 이처럼 줄어든 인구에 대한 대응책으로 도시계획 측면에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바로 ‘콤팩트 시티’다. 말 그대로 다양한 도시 기능을 주로 지하철역 같은 교통의 결절점에 압축해 효율성을 높인다는 개념이다.
그런데 콤팩트 시티는 결국 특정 지역에 자원을 몰아준다는 얘기다. 콤팩트 시티는 여러 지자체 중 한 곳에만 있을 수도 있고, 지자체와 지자체 중간에 있을 수도 있다. 당연히 ‘왜 너희만 지원받느냐’며 불만을 갖는 지역이 나오게 된다. 초광역 협력 혹은 메가시티 논의는 그래서 콤팩트 시티와 쌍을 이뤄 도입돼야 한다. 인접한 지자체가 운명공동체이며, 이 같은 자원 배분이 모두를 위한 길이라는 이해와 합의가 우선돼야 한다. 콤팩트 시티가 조성된 뒤에는 그 과실을 어떻게 분배할지 역시 여러 지자체가 함께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간 부산·울산·경남 메가시티 논의만 보더라도 한국에서 이 같은 합의를 이루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놓고 선거를 치러야 하는 지자체장들이 대승적 차원에서 인내하자고 주민을 설득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기에 그만큼 중앙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지자체 간에 광역권을 형성해 오면 중앙정부가 승인, 지원해주는 식으로는 부울경 메가시티 무산과 같은 사례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일정 인구를 넘는 메트로폴(대도시권)에 코뮌(시, 읍, 면)이 자동으로 소속되도록 한 프랑스 등 중앙정부 차원에서 강력한 제도적 틀을 만든 해외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어차피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이 시기를 놓치면 인구 감소의 충격을 모든 국민이 맨몸으로 느끼게 된다는 위기감이 가장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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