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을 저지르거나 실패를 하고서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정말 드뭅니다. 늘 구실을 대며 나름대로 까닭을 밝히기 마련입니다. 심리적으로, 책임을 부담하지 않으려거나 손상된 자존감을 지키려면 변명이 필요하기는 합니다. 변명(辨明)은 ‘분별해서 밝힌다’는 뜻이지만 본질은 숨기는 행위입니다. 변명을 늘어놓다가 자신이 한 말과 말이 서로 앞뒤가 안 맞아서 부딪히면 마음이 들여다보입니다. 변명이 습관이 되면 모든 일을 자신이 아닌 남 탓으로 돌리는 투사의 중독 상태에 빠져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음모론까지 이어간다면 최악으로 치닫는 겁니다. 변명을 일삼는 사람은 변명을 통해 마음이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처음에는 횡설수설하다가도 나름의 논리와 질서가 통합된 상태를 갖추게 되고 스스로 생각에도 제법 그럴듯하게 들리면 스스로를 속이는 단계로 넘어갑니다. 물론 자유로움은 얻지 못합니다.
변명에도 유통기한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 변명이 먹히지 않으면 선동(煽動)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변명이 내 마음을 가리는 행위라면 선동은 남의 마음을 내 마음대로 움직이려는 시도로 이해합니다. 변명이 이미 일어난 일에 소극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라면 선동은 적극적으로 미리 일을 꾸미는 겁니다. 선동은 화려합니다. 누구도 쉽게 부정할 수 없는 ‘올바른 가치’를 내세웁니다. 모습이 그러하니 선동가의 마음은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혹시 나쁜 마음으로 사람들을 부추겨서 이용하려는 것인가? 그런 의문이 들어도 헛갈리고 혼란스럽습니다. 애를 쓰면서 깊게 오래 생각해야 본질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자신이 직접 손을 대지 않고 여론을 조성해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면? 선동입니다. 생각을 이리저리 할 수밖에 없으니 머리 아픈 일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을 성향에 따라 둘로 나누면, 어떤 사람들은 오래 깊게 생각해서 결론을 내립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다가는 마음이 어수선하고 복잡해져서 빨리 결론을 내립니다. 학술적으로 풀어내면 ‘인지적 욕구’가 높은 유형 그리고 낮은 유형입니다. 오해하시지 말 것은, 인지능력 자체의 높낮이와는 전혀 무관합니다. 선동에 한정하면 인지적 욕구가 높아야 쉽게 넘어가지 않고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선동가는 자신의 논점을 직접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면서 비슷하게 보일 수 있는 현상이나 사실에 빗대어서 주장하기를 좋아합니다. 언뜻 들으면 논점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 같으나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주장하는 문제의 성격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듣는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려는 겁니다. 그러니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과 저것이 그런 방식으로 비유할 수 없는 경우가 흔합니다. 선동가의 주장이 비유 대상에 비해 가볍거나 덜 중요한, 엉뚱한 비유인 겁니다. 워낙 교묘해서 본질을 알려고 하는 인지적 욕구가 높지 않으면 깨닫지 못하고 선동됩니다. 특히 감성적으로 쉽게 흥분하는 성격이면 그러한 비유가 오히려 그럴듯하게, 심지어 멋있게 들립니다. 항상 본모습 숨기기가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선동가의 삶, 살아온 과정 그리고 겪어 온 일들과 세밀하게 비교해보면 주장의 허구성이 드러나기도 합니다. 위험 부담을 무릅쓰고 가짜 뉴스 등으로 선동하는 경우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노릴 수 있다고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선동가는 자신의 마음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해 부추기려고 끈질기게 노력합니다. 아무리 엉뚱한 이야기도 반복되면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런 방식으로 투자 대비 효과를 높입니다. 선동의 본질은 민주주의 정신에 어긋납니다. 제대로 정보가 제공된 논의가 이루어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눈을 감성적인 호소로 가려서 실체를 못 보도록 방해합니다. 개인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판단할 기회를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움직여서 막습니다. 사리에 맞고 온당한 합리성의 힘을 침식합니다. 공격하려는 대상의 이미지를 사람들이 크게 비판할 수밖에 없는 나쁜 틀 속에 가두려고 전력을 기울입니다. 악평, 비방, 중상은 물론이고 인신공격도 퍼붓습니다. 선동가는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같이 논의하려고 하지 않고 밀어냅니다. 이성적 논의와 공감을 공유하는 것보다는 두려움과 같은 감성에 호소해야 유리하다는 타산에 매우 밝습니다. 선동가는 깊은 생각을 몰아낸 자리를 환호와 갈채로 덮으면서 만면에 미소를 띱니다.
선동가의 마음을 읽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해서 인정사정없이 행동으로 옮겨도 그 사람의 주장을 살짝 뒤집으면 본질이 환하게 보입니다. 정의를 소리 높여 외친다면 스스로 정의롭지 않다는 뜻입니다. 선동가는 인지적 욕구가 높은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은 임금님’일 뿐입니다. 위기감을 느낀 선동가는 급한 마음에 더욱더 힘을 써서 선동을 쏟아낼 겁니다. 운동장을 기울여서 자신이 유리한 상황을 차지하려고.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스스로 미끄러질 수 있음을 애써 잊었다면? 세상은 묘하게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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