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비펀은 미술사에 기록되지 않은 여성 화가다. 그 대신 많은 자화상을 남겨 스스로를 기록했다. 검은색 의상을 차려입은 그림 속 화가가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탁자 위에는 그림 도구들이 놓여 있다. 벽에 걸린 것 같은 미니어처 초상화를 그리는 중인가 보다. 그런데 양팔이 없다. 오른쪽 어깨에 작은 붓이 고정돼 있을 뿐. 어찌 된 일일까?
비펀은 1784년 영국 서머싯의 한 농가에서 양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났다. 가난한 집에 짐이 되고 싶지 않아서, 어릴 때부터 입으로 바느질하고 글 쓰고 그림 그리는 법을 독학했다. 13세 무렵, 비펀의 부모는 박람회나 서커스를 여는 듀크스라는 남자에게 딸을 맡겼다. 장애를 가진 딸이 밥벌이하며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을 터다.
비펀은 관중들 앞에서 입과 어깨를 이용해 바느질하고, 글 쓰고, 미니어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은 꽤 잘 팔렸지만, 지급받는 돈은 미미했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부유한 귀족의 후원으로 16년간의 떠돌이 공연 생활을 청산하고, 왕립예술원 화가에게 그림을 정식으로 배울 수 있었다.
성취 속도는 놀라웠다. 1821년 영국예술협회의 메달을 수상하고, 왕실의 미니어처 초상화도 의뢰받게 되면서 비펀은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되었다. 이 자화상은 그녀의 명성이 최고조에 이르렀던 30대 중반 작품이다. 화가는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를 그렸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아니라, 화구들에 둘러싸여 있는 전문 화가의 모습 말이다. 안타깝게도 봄날은 잠깐이었다. 1827년 후원자가 죽고, 매니저가 돈 대부분을 탕진하면서 그는 다시 궁핍해졌다. 장애인 여성에 대한 편견도 여전했다. 1850년 비펀이 사망하자 그의 이름도 작품도 빠르게 잊혔다.
가치 있는 것은 언젠가는 발견된다. 시대가 위인을 재발견하기도 한다. 2022년 11월 비펀의 예술적 업적을 조망하는 전시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작가 사후 172년 만에 갖는 첫 개인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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