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송충현]“연임 고집하면 조직 죽는다” 이런 걱정 올해도 반복될지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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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충현 산업1부 차장
송충현 산업1부 차장
“연임을 포기하지 않았다면 조직이 난장판 됐을 겁니다.”

몇 해 전 금융회사를 취재할 때 차기 은행장 경쟁 레이스를 스스로 포기했던 한 은행장과 인터뷰를 나눈 기억이 있다. 당시 재임 중이던 대통령과 연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사가 차기 행장 후보로 급부상하자 고심 끝에 연임을 포기하고 자진 사퇴한 직후였다.

연임을 포기하겠다는 내용의 e메일을 임직원에게 보낸 뒤 고객과 마지막 인사를 마치고 자정 무렵 귀가하던 그를 집 앞에서 만났다. 그는 기자를 자택으로 초대해 차 한 잔을 내주었다. 그러곤 연임을 포기한 진짜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는 ‘윗선’에서 특정 후보를 미는 걸 아는 이상 도저히 연임을 고집할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윗선’의 의중을 알고도 버텼다가 금융당국으로부터 직무정지 처분을 받고 이사회에서 해임이 의결된 모 금융그룹 수장의 이야기를 꺼내며 “연임하려 들면 가능했겠지만 이후 조직은 다 죽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윤석열 대통령이 금융위원회 업무보고에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강조한 뒤 문득 이때의 인터뷰가 떠올랐다. 뚜렷한 대주주가 없어 ‘주인 없는 회사’로 불리는 금융사와 KT 등에서 사실상 정부가 인사와 경영진의 거취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당시와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던 이유는 하나다. 기업은 정부의 ‘뜻’이라는 게 실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 과연 이를 따르지 않고도 무사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정권 교체기에 금융회사 수장들이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를 받으며 옷을 벗었던, KT의 최고경영자(CEO)들이 검찰 수사를 받으며 불명예 퇴진했던 역사가 반복되지 않으리란 법이 있느냐는 것이다.

통신업계 안팎에선 구현모 KT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윤 대통령의 발언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마저 나온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구 대표의 연임 가능성을 점치던 이들조차 “이제 상황이 바뀐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다. KT 내부에서는 구 대표가 무리하게 연임을 하려다 조직에 악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오는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쪼개기 후원’으로 재판 중인 구 대표가 사법 리스크의 불똥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있다. 구 대표는 ‘국회의원 후원금 쪼개기 지원 사건’에서 명의를 빌려준 혐의로 1500만 원의 벌금형 약식 명령을 받고 불복해 정식 재판 중이다.

기업의 수장이 명백한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새로운 인사로 대체되는 게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부와 연이 있는 인사가 그 자리에 간다 해도 적합한 인물이 적합한 자리를 차지한다면 조직 전체에도 긍정적일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뜻에 반했다는 이유로 기업의 수장이 감독당국과 검찰의 조사를 받거나, 조직 구성원들이 회사가 망가질 것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면 분명 문제가 있는 상황이다. 2023년에 과거 찍어내리기식 관치 논란의 망령이 반복되는 건 시대에 맞지도, 정당하지도 않다.

#연임#고집#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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