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집트 여행을 다녀왔다. 역사학자가 유적 답사를 한다면 그리스, 로마 이전에 제일 먼저 방문해야 할 곳이 이집트이다. 이런 곳을 이제야 왔다니 부끄러운 마음이 앞선다.
피라미드, 아부심벨 신전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적으로 무척 궁금했던 곳이 고대 이집트 상왕국의 수도였던 멤피스였다. 대영박물관에 가면 수많은 아시리아 역대 황제들의 전쟁 기록을 모아 놓은 부조들이 있다. 이 중에서 제일 완벽하고 훌륭한 컬렉션이 아슈르바니팔 2세의 부조이다. 이 중에 아시리아군이 멤피스 성을 공략하는 장면이 있다.
이중의 성벽, 촘촘히 늘어선 탑, 이 강력한 성을 아시리아군이 무시무시하게 공략한다. 당시 이 성을 지키던 병사는 이집트인이 아니라 지금의 남수단인 누비아의 사람들이었다. 오랫동안 이집트의 속국으로 지내던 누비아가 거꾸로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로 군림하고 있는데, 아시리아가 쳐들어온 것이다. 누비아는 아시리아에 패함으로써 이집트 통치를 종식한다. 멤피스 성도 함락되어 남자들은 살해되고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 이주를 당했다.
멤피스에 가면 이 성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까? 볼만한 상태까지는 아니어도 최소한 어느 정도 흔적이라도 있기를 바랐다. 그런데 일말의 기대는 충격적인 실망으로 끝났다. 멤피스에는 멤피스에서 발굴된 유물을 모아 놓은 작은 야외 박물관이 있는데, 거대한 람세스상과 스핑크스라는 인상적인 석상이 남아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유물의 양이 놀랄 정도로 적었다.
성터는 흔적도 없고 언덕에는 양과 염소만 뛰어놀고 있었다. 이집트에 산재한 수많은 유적을 모두 발굴하기란 너무나 힘들고 발굴 후 관리도 보통 일이 아니다. 멤피스는 아직 대대적인 발굴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했어도 관리 문제로 덮어 둔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멤피스 성이 패전의 장소가 아니라 영광의 장소였더라면 우선적으로 발굴하지 않았을까? 쓰라린 기억은 누구나 싫다. 대부분 나라가 덮거나 왜곡한다. 하지만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패배를 직시하고 냉철하게 분석하는 것이다. 세상을 돌아다녀 보면 이게 제일 어려운 일 같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