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수업과 논술형 평가 등을 특징으로 하는 국제바칼로레아(IB) 프로그램에 대한 교육계의 평가다. 정부가 일선 초중고교에 IB 확대 보급을 추진하고 있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지난해 12월 대구 경북대사범대부설중을 방문해 “IB는 암기와 시험 중심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는 좋은 대안이다. 확신이 들면 전국으로 확산시키려고 한다”고 밝혔다. 그러자 일선 교육 현장에서 기대와 우려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IB는 스위스에 본부를 둔 비영리 교육재단인 국제바칼로레아기구(IBO)가 1968년부터 개발해 보급한 교육 과정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 세계 159개국에서 5725개 학교가 IB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한국에서는 대구, 제주 일부 학교가 도입했고 경기, 부산, 충남 등 각 교육청도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대구 초중고교의 20%, IB 도입
현재 국내 총 32개 학교가 IB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1980년 서울외국인학교를 시작으로 12곳의 외국인학교와 국제학교가 IB 학교 인증을 받았다. 주로 주한 외국인 자녀나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한국인 학생이 다니는 곳이다. 경기외국어고도 2010년 IB를 도입했다. 2020년 충남 삼성고에 이어 이듬해 대구(14개교)와 제주(4개교)에서도 IB 인증 학교가 생겼다.
지난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새로 당선된 시도교육감 중 상당수가 공교육 혁신을 위한 미래 학교의 모습으로 IB를 지목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올해 관내 200개교를 IB 기초학교로 운영할 계획이다. 기초학교는 IB 과정을 연구하고 도입을 준비하는 학교로, 이후 관심·후보학교 단계를 거쳐 IBO의 최종 심사와 인증을 받는다.
국내에서 IB 학교가 가장 많은 대구는 올해 60개 기초학교를 포함해 총 92개 초중고교에서 IB를 운영하거나 IB 도입을 준비한다. 전체 455개 초중고교의 약 20%다. 강은희 대구시교육감은 본보와의 통화에서 “IB가 소수 엘리트만을 위한 교육이 돼선 안 된다”며 “가능한 한 많은 학교에 IB 교육 방법을 확산시키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교육 과정에 논문-봉사 등 필수 포함
세계 IB 인증 학교가 운영하는 초중고 학교급별 과정은 2018년 5803개에서 지난해 7789개로 4년 새 34.2% 늘었다. 그만큼 경쟁력을 인정받는다는 뜻이다. IB 과정의 가장 큰 특징은 학생이 지식 습득에만 그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가게 하는 데 있다. 고교 과정(DP)을 기준으로 △어학과 문학 △언어 습득 △개인과 사회 △과학 △수학 △예술 등 6개 교과로 구성되는데 일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해당 과정을 공부하는 깊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선 차이가 크다. DP 학생에겐 지식론, 과제 논문, 창의·활동·봉사 등 3가지 필수 과제가 주어진다. 4000단어 이상 분량의 논문을 쓰고, 인터뷰 형태의 구술 평가도 받아야 한다. 예술, 스포츠, 봉사 활동도 2년간 최소 150시간 이상 이수해야 한다.
고교 IB 과정은 영어 수업이 기본이지만 현재 공립고에선 한국어도 사용할 수 있다. IBO와 수업을 모국어로 진행할 수 있도록 ‘이중 언어’ 협약을 맺었기 때문이다. 6개 주요 교과 중 영어와 다른 한 과목은 영어로 수업을 진행하고 나머지는 한국어를 쓴다. 가령 대구의 경북대 사범대 부설고는 연극과 물리 수업 등을 영어로 진행한다.
●교육 격차-대입 제도 충돌 문제 우려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우려는 IB가 교육 불평등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각 교육청이 IB를 도입하려는 이유는 공교육 혁신을 통해 일반고에서도 학생의 창의성 교육과 맞춤형 교육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IB 도입에는 재정 부담이 만만치 않다. IB를 도입하려면 학교마다 연간 1000만 원 이상의 연회비를 내야 한다. 여기에 IB 인증과 교사 연수 비용도 들어간다. 현재는 각 교육청이 이를 부담하고 있지만, 모든 학교를 지원해 IB로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토론과 탐구 중심의 IB 수업을 진행하고, 에세이 등 과제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교원을 양성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오히려 IB를 도입한 학교와 그러지 못한 학교 간에 교육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승진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위원은 “IB가 특권층이나 상위권 학생을 위한 학교로 이용되면 교육 양극화와 학교 서열화는 더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는 ‘IB를 대학 입시와 어떻게 연계시키느냐’와도 직결된다. 현재 IB는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중심의 국내 고교 과정과 충돌하는 지점이 많다. IB 과정의 학생들에겐 수능 준비를 따로 시키지 않는다. 매년 11월에 3주간 치러지는 IB 평가에 응시하려면 수능을 사실상 포기해야 한다. 서로 시험 기간이 겹치기 때문이다. IB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는 수시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에 가야 한다.
전문가들은 내년도 대학 입시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2021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IB 인증을 받은 고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 올해 고3이고, 내년에 대학에 진학하기 때문이다.
당장 대학들은 이 학생들의 학생부 성적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분위기다. IB 과정은 절대평가인 반면 국내 일반고, 자율형사립고 등 나머지 모든 학교들은 상대평가를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 완전히 다른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만큼 평가도 어려운 상황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 입학사정관은 “IB는 학생 평가 방식, 교육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나머지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얼마나 우수한지를 평가할 잣대가 마땅치 않다. 학교마다 수시 전형을 앞두고 혼란이 클 것 같다”고 말했다.
김성천 한국교원대 교육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초중고 교육 예산을 특정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학생에게 집중적으로 쓰는 것이 옳은지 고민해야 한다”며 “IB 학교 학생들의 중도 탈락률, 대입 등 국내 교육 체계와의 충돌 문제를 종합적으로 분석한 뒤 도입 방향을 중장기적으로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먼저 도입한 日, 비용-교원 확보 어려움
우리보다 먼저 국가 차원에서 IB를 도입한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일본 정부는 2013년 글로벌 인재 양성을 위해 IB 과정을 향후 5년간 200개교에 도입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 IB 인증학교는 102개에 그쳤다.
비용 부담이 큰 데다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교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교육개발원은 지난해 7월 보고서에서 “IB 교육 과정이 우수하더라도 국가 교육 과정과 연계되지 않으면 학교 현장의 부담이 가중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처럼 IB 교육의 정착을 위해선 수능 중심의 고교 교육 과정과 대입 제도 개선, 교원 역량 강화, 학부모와 학생의 평가 공정성에 대한 신뢰 등이 병행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IB를 교육 혁신의 ‘만병통치약’으로 여기는 시선을 경계한다. 손민호 인하대 교육학과 교수는 “어차피 모든 학교에 IB를 도입할 순 없다. IB 학교가 아니더라도 IB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를 한국 현실에 맞춰 적용할 수 있도록 학교 간 교육 격차를 최소화하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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