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이야기는 반복하여 들어도 매번 좋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정수사 구빙녀(正秀師 救氷女)” 이야기, 즉 정수라는 스님이 추위에 죽어가는 여자를 구한 이야기도 그렇다. 추운 겨울에 일어난 따뜻한 이야기다.
신라 애장왕 때니까 지금부터 1200여 년 전의 이야기다. 스님은 날이 저물어 자신의 절로 돌아가는 길을 서두르고 있었다. 지독히 추운 겨울날이었다. 그런데 어떤 절 앞을 지나치는데 거지 여자가 아이를 낳고 누워서 죽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자기도 모르게 여자의 몸을 껴안고 덥히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자 여자의 몸에 온기가 돌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주인과 하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인은 눈 속에서 하인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하인의 몸을 자기 몸으로 덮어 하인을 살린다. 삼국유사 속의 스님은 더 난감한 상황이다. 상대는 남자가 아니라 아이까지 낳은 여자다.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고 말고 할 겨를이 없었다. 어딘가에서 솟아난 연민의 감정이 여자의 몸을 껴안도록 만들었다. 연민이 생각을 앞지른 것이다. 톨스토이라면 어떤 존재가 그에게 여자의 몸을 껴안으라고 명령하고 그는 기꺼이 그 말에 복종했다고 표현했을 것이다. 절대자의 윤리적 명령에 복종했다고나 할까. 어쨌거나 스님의 따뜻한 마음, 아니 몸이 죽어가던 여자를 살렸다. 여자가 깨어나자 난감해진 스님은 옷을 벗어 덮어주고 황급히 그곳을 떠났다. 그는 벌거벗은 몸으로 꽤 멀리 떨어진 사찰까지 정신없이 달려갔다. 그리고 거적때기를 덮고 추위에 오들오들 떨며 밤을 보냈다.
삼국유사는 여기에서 얘기를 끝내고 그 승려가 애장왕의 국사가 되었다는 사실을 짧게 전한다. 그가 임금의 스승이 된 것은 높은 학식이나 학문 때문이 아니라 실천적 연민 때문이었다. 자기 옷을 내어주고 벌거숭이가 되어 달려가고 거적때기를 덮고 밤을 나는 실천적 연민, 그 눈부신 몸짓 앞에서는 제아무리 높은 학식이나 학문도 창백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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