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일하려고 살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일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질색을 한다는 넷플릭스 드라마 ‘에밀리 파리에 가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미국 마케팅기업이 인수한 파리의 명품 전문 마케팅업체에 파견된 본사 직원 에밀리가 업무에 강한 의욕을 보이자, 이를 불편해하는 프랑스인 선임 직원이 해주는 충고다. 달리 말하면 “너무 무리해 주변 사람 힘들게 만들지 말고, 살살 하자”는 거다. 미국인 시각에서 프랑스인 삶의 태도를 과도하게 전형화한 것은 맞지만 어느 정도 진실도 담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추진하는 연금개혁의 핵심은 일하는 나이를 현재 62세에서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64세로 올리는 부분이다. 은퇴자 증가로 불어나는 재정 악화, 미래세대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다. 프랑스는 정년과 은퇴 연령을 일치시켜 놔서 일도 2년 더 해야 한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생각하는 이상적 퇴직 연령은 60.6세다. 10명 중 6명은 60세 이전 은퇴를 원한다. 실제 프랑스의 평균 은퇴 연령도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몇 년씩 빠르다. “더 오래 일하자”는 마크롱 개혁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이유다.
연금개혁의 큰 파도를 맞은 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1988년 도입된 국민연금은 초기 가입의 거부감을 줄이기 위해 내는 돈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약속했다. 소득의 9%인 현재 보험료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의 절반 수준인 데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져 올해 33세 근로자가 연금을 받기 시작할 2055년에 기금이 완전히 고갈된다. 이걸 아는 2030청년들이 “받지도 못할 국민연금 차라리 탈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하지만 한국은 프랑스와 분명히 다른 게 있다. 재작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의 55∼59세 장년층이 희망한 은퇴 연령은 70세. 프랑스인들보다 9년 이상 늦다. 다만 현실은 많이 달라서 가장 오래 일하던 일터를 떠날 때 남성 근로자의 평균 연령은 51.2세, 여성은 47.7세다. 한국의 55∼64세 장년층 고용률도 66%로 77%인 일본, 72%인 독일보다 크게 낮다. 한국의 중장년층은 기회가 없을 뿐 더 일하고, 연금을 더 오래 낼 의욕이 여전히 넘쳐난다.
이들을 더 일하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이 60세 법정 정년과 하락하는 생산성에 맞춰 임금을 낮출 수 없게 만드는 연공서열식 호봉제다.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청년 일자리를 중장년층이 뺏는다’라는 비판, 강성노조의 반발, 그로 인한 득표 손해를 의식해 문제를 방치해 왔다. 이런 생각이 그릇된 선입견일 수 있다는 증거가 요즘 속속 나오고 있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최근 2030세대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60세 정년을 연장하는 데 반대한 청년은 25%, 찬성은 그 3배인 75%였다. 찬성의 첫 번째 이유는 ‘노년 빈곤 문제 해결’(46%), 두 번째가 ‘청년층 국민연금 부담을 줄인다’(20%)였다. 부모·삼촌 세대가 더 일해 줘야 미래에 자신들이 져야 할 짐이 가벼워진다고 생각하는 청년들이 훨씬 많다는 뜻이다. 청년 알바 구하기에 지친 자영업자들도 구직 광고에 ‘중장년층 환영’이라고 써넣기 시작했다. 인구는 줄고, 더 좋은 일자리를 찾는 청년들 대신 나이 든 세대가 할 일이 생겨나고 있다.
한국 베이비부머의 대표 격인 ‘58년 개띠’들이 올해 65세다. 그 뒤 10년간 태어난 이들의 ‘더 일할 의욕’은 연금개혁 등을 둘러싼 K부머와 MZ세대의 대립적 관계를 괜찮은 궁합으로 바꿀 수 있는 한국만의 자산이다. 일반인 500명을 모아 토론하자며 개혁을 미루고, 임기 끝날 때쯤에나 개혁 완성판을 내놓겠다는 정치권과 정부가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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