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지지 않을 결심[이기진 교수의 만만한 과학]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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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교수 그림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이기진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연구실 대학원생의 책상 위에 철학자 김형석 교수의 ‘고독이라는 병’이라는 책이 놓여 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책이다. 그때 나는 토요일 오후 학교 앞 헌책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60년대 출판된 낡은 표지의 ‘고독이라는 병’을 읽고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나에게 고독이 병이라고 조목조목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교 선생님도 부모님도.

다시 읽어 보니 새롭다. 많은 세월이 지났음에도 새로움이 발견된다. 책 내용은 변함이 없을 텐데, 그 사이 고독에 더 익숙해졌기 때문일까? “선생은 늙지 않아야 한다.” 이런 글귀가 나온다. 선생이 늙어간다는 것은 학생들의 마음과 멀어진다는 의미이고, 학생들과 멀어지지 않는 방법은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교수가 된 다음부터였다. 나는 더 고독해지기 시작했다. 박사 과정 때는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과 만날 때마다 물리 이야기만 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친놈처럼 서로 떠들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는 지식이 서로 비슷했고 같은 문제를 고민하고 있었고 추구하는 목표가 서로 같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온종일 물리 이야기를 해도 끝이 없었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교수가 된 다음엔 대학원생 제자들과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했다. 작은 실험실에서 온종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같이 밥을 먹고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아쉬운 마음에 학생들과 생맥줏집에서 밤새 물리 이야기만 했다. 그래서 친구이자 동료 같았던 제자들이 한두 명 졸업하고 연구실을 떠날 때면 상실감에 한동안 방황하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한 세대 차이만 존재했을 뿐 제자들은 같은 어려운 문제를 함께 풀어가는 동료였고, 같은 세대를 공감하며 함께 살아가는 존재였다. 하지만 제자들이 졸업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함께했던 시간들로부터 멀어져가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고독이 깊어져갔다. 병처럼.

아인슈타인의 고독을 떠올려본다. 1919년, 일반상대성 이론을 검증하는 아서 에딩턴의 개기일식 관측 실험이 성공하자 아인슈타인의 인기는 폭발했다. 그는 갑자기 인기를 얻게 됐고, 그의 연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 존경을 받았으며, 그의 영향력도 나날이 커졌다. 그 무렵, 세상에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다. 우연과 확률에 기대는 양자역학적인 해석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회의적이었다. 우주의 존재 이유를 찾던 아인슈타인에게는 우연이나 확률 무작위가 아니라 견고한 인과적인 논리가 필요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논쟁적인 반박에도 불구하고 양자역학은 견고한 학문으로 발전해갔다. 아인슈타인은 더 고독해졌고 점점 외로워졌다. 양자역학을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고집과 철학은 그를 시대정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했다. 마치 멀어져가는 블랙홀의 존재처럼. 아인슈타인이 느꼈을 고독의 무게가 새삼 다가온다.

요즘 자주 김형석 교수가 말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방법’이 무얼까 생각하다가 지하철 한 정거장을 지나치곤 한다. 생각이 분명해진다. 세대차로 인한 고독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늙지 않아야 한다. 새로운 세대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목적지를 놓치게 된다.

#멀어지지 않을 결심#고독이라는 병#김형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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