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설 원조 논쟁’[폴 카버 한국 블로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2월 10일 03시 00분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폴 카버 영국 출신·유튜버
폴 카버 영국 출신·유튜버
나는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한국어를 배우기 전에는 중국어가 대학교 전공이었다. 중국어를 배운 경험은 한국어를 배우는 데에도 도움이 됐던 것 같다. 두 언어가 문법은 다르지만 한국어의 많은 단어들이 한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져서 단어를 보고 뜻을 유추하는 게 가능했다. 그러나 중국어로 알고 있던 단어를 한국 발음으로 바꿔서 말하는 것이 매번 맞지는 않았다. 완전히 다른 단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대학 2학년 때 나는 베이징으로 유학을 갔다. 1년 동안 중국어를 배우면서 거기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같이 공부하다가 한국 문화를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대학 2학년이 끝나는 여름방학 때 한국에서 문화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경험을 통해 단순히 관광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는, 한국 문화에 대한 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된 것 같다. 중국에 있을 당시만 해도 중국과 한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더 많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오래 살고 보니 두 나라는 어쩌면 차이점이 더 많은 듯하다.

유사점이라면, 두 나라 모두 자부심이 대단해서 국제적으로 유명해진 발명품이나 음식들의 기원에 대해 매우 뿌듯해한다. 국수, 화약, 금속활자 등등이 그것들인데, 어떤 것들은 그 기원의 출처를 밝히기가 애매하지만, 다른 것들은 그 기원이 명확하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불거진 한복과 김치의 기원에 대한 중국의 주장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뒤이어 설날의 기원까지도 논쟁에 끼워 넣고 있는 모양새다.

오랫동안 음력설은 영어로 중국 새해(Chinese New Year)로 불렸다. 세계 곳곳에 사는 중국인들이 모여 생긴 차이나타운에서 각종 퍼레이드와 여러 기념행사가 열렸으니 그도 그럴 만하다. 베트남전 당시의 구정 대공세(Tet Offensive)로 인해 베트남의 음력설도 어떤 이들에겐 귀에 익은 단어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한류 바람을 타고 이제 세계인들이 설날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지고 있다. 이것이 중국 정부와 중국 누리꾼들을 불쾌하게 만들었고 급기야는 세계에서 음력설을 중국 새해로만 통일해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설날이라는 단어를 쓰는 유명인들과 기관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한 예로 영국의 대영박물관은 이런 중국의 주장에 굴복해서 결국엔 “즐거운 중국 새해”라는 메시지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띄우기에 이르렀다.

사실상 음력설은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권에서 여러 다른 이름으로 그 전통을 이어왔다. 싱가포르 남부 지역에서부터 베트남, 중국, 몽골, 한국에 이르기까지 설날을 중요한 국가적 공휴일로 지정해 왔다. 공휴일이 같은 날짜이지만 각각의 나라는 각기 다른 고유한 방식으로 음력설을 기념한다. 크리스마스를 영국, 독일, 프랑스 등 거의 모든 유럽 지역에서 같은 날에 각각 다른 방식으로 기념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여러 나라에서 함께 기념해온 음력설을, 중국 설로만 지정해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은 국가의 위상과 자부심을 높이는 통로가 될 수 없다.

비슷하면서 다른 이슈일 수도 있는데, 동해를 일본해로 부르는 관행을 고치기 위해 한국 정부와 여러 기관에서 많은 자금을 투입해서 여러 노력을 기울이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한국분들에게는 민감한 이슈일 수 있지만,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동해와 일본해의 표기에 대해 거의 무관심한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마치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놓인 해협을 대부분의 나라에서 영국해협(the English Channel)으로 무관심하게 쓰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프랑스에서는 이 해협을 라 망슈(la Manche)라 부른다.

언어는 상징이고 트렌드다. 보통, 힘을 가진 나라의 언어가 지배적이 되는 것은 역사적 트렌드였다. 그래서 전통과 지역들이 언어보다 먼저 존재했음에도 ‘지배의 언어’가 이를 특정 방식으로 정의 내려 왔다. 그러나 특정 지배의 언어가 음력설을 중국 설로 불렀다고 해서 그 전통이 중국 전통이 되는 건 아니다. 언어를 조작해서 사실을 변질하려는 시도는 국가적 자부심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의 조롱거리가 되는 부작용을 낳는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장황하게 썼지만 내 요지는 이렇다. 이제 대세는 ‘설날’이다. 케이팝, 케이콘텐츠 등을 통해 모든 단어를 강력히 흡입하는 ‘K-’의 위력을 설날에도 모아, 조금 늦었지만 여러분 모두에게, ‘Happy K-New Year!’

#한국#중국#음력설 원조 논쟁#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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