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경호 부총리가 최근 “물가 안정이 확고해지면 모든 정책 기조를 경기 쪽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했다. “아직은 물가 안정 기조를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고 부연하긴 했지만, 시장은 물가가 꺾일 기미를 보이면 정부가 경기 부양 쪽으로 정책기조를 바꿀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부총리 발언에는 한은이 0.5%였던 기준금리를 1년 반 만에 3.5%로 끌어올린 효과가 시차를 두고 나타날 것이란 기대가 반영돼 있다. 5%대 물가가 하락하면서 상반기 말쯤 안정세를 찾을 것이란 희망이다. 야당뿐 아니라 여당 내에서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중산층까지 난방비를 지원하자는 주장이 나온 것도 정부의 태도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달 초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상반기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을 4.0%에서 4.2%로, 하반기 2.5%에서 2.8%로 높이는 등 물가는 여전히 불안하다. 5% 밑으로 떨어지는 건 4, 5월이나 돼야 기대할 수 있다. 게다가 공공요금 인상을 오래 미뤄둔 탓에 다른 선진국들에 비해 인플레이션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전기, 가스, 교통요금 추가 줄인상은 이미 예고돼 있다.
그나마 미국에선 7%대 고물가, 한국보다 높은 고금리에도 완전고용 수준의 낮은 실업률이 유지되면서 경기 침체 우려가 잦아들고 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침체 흐름이 뚜렷하다. 극심한 수출 부진에 가계·자영업자의 과도한 부채, 고금리가 겹쳐 올해엔 25년 만에 일본보다 낮은 성장이 예상된다. 성장률이 1%에 못 미칠 것이란 전망까지 나오는 만큼 정부로선 재정지출을 통한 경기 부양의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섣불리 긴축에서 부양으로 기조를 바꾸는 건 향후 경제 운용에 치명적인 독(毒)이 될 수 있다. 미국과의 금리 차를 줄이려면 한은은 아직도 한두 차례 기준금리를 더 올려야 한다. 지금부터 정부가 돈 풀기에 나서면 통화정책과의 엇박자 속에 고물가가 더 오래 지속되고, 머잖아 다른 나라들이 금리를 내릴 때는 오히려 물가를 잡기 위해 고금리를 유지해야 하는 진퇴양난 상황에 빠질 수 있다. 그토록 강조해온 건전재정 기조가 조기에 무너질 가능성도 있다. 아직은 부양 카드를 서두를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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