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청동기 시대가 존재했는지를 둘러싸고 학계에선 오랫동안 논쟁을 벌였다. 일제강점기의 일본인 학자들은 한반도에 청동기 시대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면서 일부 알려져 있던 청동기는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라고 주장했다.
광복 후 우리 학계는 그러한 주장을 비판하며 한국적인 청동기 문화를 찾으려고 전국 각지의 고인돌을 발굴하는 등 동분서주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196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간 한국적인 청동기가 곳곳에서 발견되면서 비로소 오랜 숙원을 풀 수 있었다. 그 무렵 모습을 드러낸 청동기는 어떤 것들이고 그것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이었을까.
텃밭서 ‘캐낸’ 청동기 실타래
1967년 7월, 대전 괴정동에 거주하던 한 주민이 자신의 텃밭에서 땅을 파던 중 청동기 12점을 발견해 시교육청에 신고했다. 같은 해 8월 29일, 대전시교육청을 찾은 국립박물관 윤무병 학예관은 신고품 가운데 동검이나 청동거울처럼 눈에 익숙한 것도 있지만 방패 모양, 칼 손잡이 모양, 둥근 뚜껑 모양을 한 청동기 등 처음 보는 것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인지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날 오전 10시쯤 발굴을 시작해 표토를 제거하자 곧 무덤의 윤곽이 드러났다. 흙을 조금씩 제거하며 혹시 유물이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 점의 유물을 찾아냈다. 조사 후 윤 학예관은 이 무덤에서 출토된 동검은 서기전 4세기 무렵 제작된 것이고, 함께 발견된 청동거울, 작은 종 모양 방울, 방패 모양 청동기, 칼 손잡이 모양 청동기, 둥근 뚜껑 모양 청동기 등은 그 무렵 새롭게 만들어진 것으로, 제사장의 상징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유사한 청동기들이 1976년에는 아산 남성리, 1978년에는 예산 동서리, 2016년에는 군산 선제리에서도 발견되었는데 거의 같은 장인이 만든 것처럼 비슷해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 아마도 한곳에서 만들어진 것이 대전, 아산, 예산, 군산의 유력자들에게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나팔 모양 청동기’의 기원은?
예산 동서리에서 마을 주민들이 공사를 하다가 발견한 다량의 청동기 가운데 이 시기 청동기 문화의 기원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나팔 모양 청동기’ 2점이 그것이다. 발견 직후 정확한 쓰임새를 몰랐기에, 외형이 나팔처럼 생겼다고 하여 그리 이름을 붙였다.
이 청동기는 기초를 이루는 아래쪽이 삿갓 모양이고 위쪽이 대나무 모양이다. 2점의 외형은 대동소이하며 겉으로 보아서는 용도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 청동기의 용도를 알려주는 흔적은 고깔 모양 장식의 안쪽에 부착된 4개의 고리이다. 아마도 이 고리에 끈을 끼워 어딘가에 고정했던 것 같다.
학자들은 이 청동기와 유사한 사례가 고조선 유력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중국 랴오닝성 선양 정자와즈(鄭家窪子) 유적의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되었음에 주목했다. 그 무덤에서 나팔 모양 청동기는 말의 머리 위를 꾸몄던 장식품으로 쓰였던 것이다. 그러한 연구에 따르면 동서리의 이 청동기도 원래는 말의 머리 위를 장식하기 위하여 만든 물품일 가능성이 있지만, 역사 기록에 의하면 서기전 4세기 무렵 한반도 중부 지역에는 기마 풍습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돼 이 청동기가 실제 말 장식품으로 사용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큰 것 같다.
고물로 팔릴 뻔한 국보급 유물들
1971년 12월, 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사는 출장길에 전남도청에 들렀다가 그곳에 보관 중이던 동검, 청동거울, 청동방울 등 청동기 11점을 확인했다. 도청 관계자에게 자초지종을 확인하던 조 학예사는 하마터면 ‘국보급 유물’이 사라질 뻔했다는 이야기를 듣곤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해 여름 동네 주민이 집 둘레에 배수로를 파던 중 땅속에서 여러 점의 유물을 발견해 보관하다가 고물을 수집하던 엿장수에게 넘겼으나 다행히도 엿장수가 그것이 유물임을 알아보고 도청에 전해주고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며칠 후 조 학예사 일행은 유물이 발견된 화순 대곡리를 찾아 발굴에 나섰다. 교란된 흙을 제거하자 곧이어 무덤 구덩이의 윤곽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큼지막한 목관 조각이 발견됐지만 기대했던 유물은 더 이상 출토되지 않았다. 엿장수 덕에 살아남은 청동기는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를 잘 보여주는 대표 유물로 인정받아 이듬해 3월 국보로 지정됐다. 2008년 2월, 국립광주박물관 연구원들은 대곡리 무덤에 대한 재발굴에 나섰다. 폐가로 변한 민가의 일부를 헐어내고 발굴을 시작했는데, 민가 아래에 묻혀 있어 과거에 조사하지 못했던 곳에서 동검 2점을 새로이 찾아냈다.
학계에선 이 무덤 주인공이 대전 괴정동 청동기의 소유자보다는 1세기가량 늦은 서기전 3세기 무렵에 청동제 무기를 기반으로 위세를 떨치던 족장이었을 뿐만 아니라 청동거울이나 청동방울 등을 이용해 신비로운 능력을 보여주며 제사장 역할을 함께 수행한 인물이라 추정한다. 우여곡절을 겪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대곡리 청동기는 우리 역사의 잃어버린 한 페이지를 메워 주었다.
풀어야 할 청동기 문화 수수께끼
우리나라 청동기 문화는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된다. 이른 시기의 것을 요령식이라 부르고 늦은 시기의 것은 한국식이라 부른다. 대전 괴정동, 예산 동서리, 화순 대곡리 청동기는 바로 한국식 청동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물들이다. 앞 시기에 비하여 청동기의 질이 단단하고 무기로서의 위력이 더 강해졌으며, 의례용품으로 보이는 사례가 많은 점이 특색이다. 특히 정문경(精文鏡)으로 불리는 청동거울의 경우 지금의 기술로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늬가 정교해 보는 이의 탄성을 자아낸다. 그간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 요령식 청동기 문화와 현저히 다른 이 새로운 청동기 문화가 어떤 과정을 거쳐 등장하였는지, 또 그 문화를 만든 주체가 토착 유력자들인지, 혹은 고조선의 이주민들인지 분명하지 않다. 장차 새로운 발굴과 연구를 통해 위와 같은 여러 수수께끼들이 차례로 해명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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