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지키고 있을게, 촛불의 약속/괜찮아. 너는 잠시 잊어도 돼/널 맡긴 거야. 이 세상은 잠시뿐인걸∼’
―1992년 윤종신 ‘너의 결혼식’ 중
그 시절, 우리에게 ‘욜로(YOLO·you only live once)’란 없었다. ‘인생은 한 번뿐’이 아니라 언제나 최소 두 번. 적어도 발라드의 세계관 안에서는, 목에 핏대 세우던 노래방 안에서는 그랬다. 돌아보면 그땐 왜 그리 ‘우리 다음 생에서…’ 유의 가사가 많았는지. 전 여자친구 결혼하는 데까지 가서 혼자 비장한 상상의 나래나 펼치고 오던 지고지순한 순정파들은 지금쯤 어디서 뭐 하며 (누구랑) 살까.
#1. ‘널 사랑했다는 이유로/저 다른 세상 힘에 겨워도/후회하진 않을 거야∼’
―1998년 조성모 ‘불멸의 사랑’ 중
1990년대엔 댄스건 발라드건 감정 과잉이 먹혔다. 그러니 ‘전사의 후예’(1996년 H.O.T.)를 자처하거나 ‘애국심’(1998년 O.P.P.A)까지 들먹였겠지. 어쨌든 이정현이 뉴 밀레니엄을 앞두고 ‘이제 잔소리 말고 내게로 다시 와줘 와줘!’(1999년 ‘와’)라 포효하기 전까지, 이별 노래 가사는 주로 이승에서 안 풀리는 이야기였다. 작사가들은 내세를 기약하다 수틀리면 상대방까지 저 위로 보내버렸다(1998년 조성모 ‘To Heaven’, 1996년 신승훈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니가 있을 뿐’).
한(恨) 많은 우리 가요사에 단장(斷腸)의 이별 노래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진주의 ‘난 괜찮아(I Will Survive)’를 보자. ‘그대가 나의 전부일 거란 생각은 마’라 일갈하는 이 곡은 사실 미국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의 1978년 명곡 ‘I Will Survive’에 대한 재해석이다.
#2. ‘보여줄게 너보다 행복한 나/너 없이도 슬프지 않아/무너지지 않아’
―2012년 에일리 ‘보여줄게’ 중
예나 지금이나 떠나간 이에게 최고의 복수는 그놈들보다 더 잘 살아내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미국 빌보드 싱글차트를 휩쓸고 있는 ‘브레이크업 앤섬(break-up anthem·제창할 만큼 매혹적인 이별 노래)’ 열풍이 반갑다. 4주째 정상을 질주 중인 마일리 사이러스의 ‘Flowers’, 2위에 버티고 선 SZA(시저)의 ‘Kill Bill’, 9위까지 찍은 샤키라의 ‘Shakira: Bzrp Music Sessions, Vol. 53’…. 이 댄스곡들은 슬픔의 축구공을 저 멀리 차버린다. 호쾌함, 그 이상이다. 간담을 서늘케 할 살벌한 가사 몇 줄을 일필휘지로 흩뿌린다.
#3. ‘댄스파티엔 내 발로 가면 돼/내 손은 내가 잡아주면 돼/너보다 내가 더 날 잘 사랑해’
―2023년 마일리 사이러스 ‘Flowers’ 중
마일리 사이러스의 분노 마일리지가 천천히 쌓여서 이제야 폭발한 모양이다. 2년여 전 이혼한 전남편이자 유명 배우 리엄 헴즈워스에게 보내는 이 ‘노래 편지’는 특별하다. 분노의 노래 활화산이 분출한 신곡 발표일, 디데이가 엄청나다. 바로 전남편의 생신 당일이다.
악당의 생일상 걷어차듯, 이 노래의 분당 박자 수(BPM·beat per minute)는 보무도 당당한 117. 클래식으로 치면 비발디의 상큼한 알레그로쯤. 킬힐 신고 슬픔의 런웨이 밖으로 걸어 나가듯 단호한 비트가 요란하게 또각댄다. 마이클 잭슨의 ‘Billie Jean’,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SexyBack’의 바로 그 템포다.
멜로디도 친숙하다. 스웨덴 그룹 ‘에이스 오브 베이스’의 히트곡 ‘Beautiful Life’(1995년)를 연상시키는 중독적 단조 선율. 이 이별 댄스곡은 한마디로 걸작이다.
#4. ‘혼자가 되느니 지옥에 가는 게 낫겠지’ ―2023년 SZA ‘Kill Bill’ 중
샤키라의 신곡은 저격용 라이플을 달았다. 타깃은 11년간 함께한 전 연인이자 축구 스타 헤라르드 피케의 여성 편력. ‘티케(-tique)’ ‘피케(-pique)’로 운율을 맞춘 역동적인 랩은 이별 유경험자들의 속에 청각적 해장국을 들이붓는다. SZA는 아예 독한 영화 ‘킬빌’에서 신곡의 모티프를 가져왔다.
그러니 우리 질질 짜지 말자. 아픈 이별도 음악을 만나면 곪은 상처 위에 멋진 무늬가 된다. 음악가는 우릴 위한 죽이는 타투이스트가 기꺼이 돼준다.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쯤 없으면 어떤가. ‘이별, 그거 별거 아니다’ 하고 속삭이는 3분짜리 팝의 매혹에 오늘도 몸을 맡긴다. 고막을 때리는 요란한 비트의 귓속말에 계속해 귀 기울인다.
‘구질구질 다음 생까지 가지 말자. 이 노래 들리는 이 순간. 현재라는 파티를 그냥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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